42 나를 놀리기만 하는 언니와 오빠를 대신해서 이제 아버지가 나의 편이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무너져 버렸고, 내게 남은 것은 봉순이언니뿐이었다. 그녀만이 우는 나를 달래 주었고, 그녀만이 내 잠자리의 베개를 고쳐 놓아 주었다. 그녀는 나와 마주친 최초의 세계였다.
258 지금, 3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하게 기억할 수 있다. 두툼한 눈자위와 뭉툭한 코, 엷은 곰보가 진 얼굴과 비어져 나온 입술, 웃으면 빨갛게 드러나던 잇몸. 내가 화가라면 나는 그녀가 늙어가는 모습을 순차적으로 그릴 수도 있으리라. 왜냐하면 그녀는 내 인생의 첫사람이었으니까. 어떤 얼굴로 변한대도 나는 그녀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 하지만...
267 그런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다가 문득 돌아봤을 때 놀랍게도 그녀가 날 바라보고 있었어. 설마 하는 눈빛으로. 희미한 확신과 놀라움과 언뜻 스치는 그토록 반가움. 나는 돌아보지 않았어. 어서 전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내려섰지. 엄마. 너무 많은 세월이 지났고, 그녀의 얼굴이 가물거려서... 그래, 그래서야, 그거지. 이제 와서 뭘 어쩌겠어. 30년이나 지났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그런데 그런데 날 더욱 뒤돌아볼 수 없게 만들었던 건, 그건 그 눈빛에서 아직도 버리지 않은 희망... 같은 게... 희망이라니, 끔찍하게... 그 눈빛에서... 비바람 치던 날, 이상한 생각에 내가 문을 열었을 때 두 발을 모으고 애타게 날 바라보던 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