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금희 지음, 곽명주 그림 / 마음산책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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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너무 멋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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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

54 오늘 복도에 서서 기침을 하자 어느 부서인지는 몰라도 상사임이 분명한 대머리가 - 왜 대체로 상사들은 대머리일까. 우리 아버지는 머리숱이 많아서 상사가 되지 못했을까. 그렇다면 내 미래에도 희망은 없어, 나는 아주 많거든, 무성하거든 - 지나가다 말고 굳이 뒤돌아 자네, 하고 불렀다.

74 선배는 자기가 너무 궁상을 떨었다 싶었는지 다른 대화할까, 하고는 대학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교수들 안부에서 출발해 동기들 근황 그리고 최근에 도서관이 다시 지어졌다는 지엽적인 정보까지. 나는 선배가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사족이 긴가 싶었는데 결국 얼마 전 출판사 일로 김 강사를 만났다고 본론을 이야기했다. 김 강사는 모교 출신 대학 강사였는데 학교 재단측에 밉보여 강단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다. 재단이 김강사를 마뜩잖아 한 건 그즈음 정권을 비판하는 글을 신문에 썼기 때문이었다. 그는 확실히 열정의 비판적 지식인이었지만 뭔가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심지어 우리와 토론 수업을 하다가 분노를 이기지 못해 강의실을 나가버리기도 했다. 학생 중 누군가 왜 우리가 해고된 노동자들을 도와야 합니까? 라고 물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열심히 했으면 안 잘렸을 것 아니에요, 라고. 다음 주에도 그는 강의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빈 강의실에 앉아 그가 ‘경제학의 이해와 적용‘이라는 강의명을 지운 뒤 쓰고 간 "깨어나자!"라는 말을 마주해야 했다.
그 일은 나중에 학교가 김 강사를 해고하는 빌미가 되었다. 그가 강의를 하지 않는 동안에도 웹을 통해 수업 자료를 제공했다는 사실은 고려되지 않았다. 선배는 지금 김 강사가 투병중이라고 했다.
"선배 그때 김 강사가 수업 안 들어왔던 거 기억해?"
"당연하지,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지금까지."

227 나는 자정이 넘어도 오지 않는 그 추운 나라의 여행객들을 기다리다 "괜찮니?"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내거나 정 염려스러우면 직접 한강에 나가봤다. 텅 빈 둔치에는 컬러가 진한 패딩점퍼를 입고 남대문이나 명동에서 구입했을 ‘금방 제대‘ ‘강심장‘ ‘큰이모‘ 유부남‘ 같은 한글이 쓰인 모자를 나눠 쓴 외국인들이 앉아 있었다.
그렇게 한강에서 돌아와 티백으로 우려낸 보리차를 내놓으면 투숙객들은 동굴 속 곰처럼 흐뭇해졌다. 내일은 술을 먹지않을 거야, 말하기도 했다. 오늘 충분히 마셨기 때문이지. 어쨌어, 즐거웠니, 즐거웠지, 우리는, 마셨거든 한강을, 한강을 어떻게 마셨어, 애초에 마시면 안 되지만 얼어서 움직이지 않잖아, 병으로 마셨지, 투명한 술병을 들어서 술의 눈금을 한강의 수위에 맞추면 꼭 한강을 마시는 기분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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