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벚꽃
이영철 지음 / 청어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읽은 책
-
아쉬웠다. 더 몰입하고 싶었는데.
겉만 핥다가 끝난 느낌이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인상 깊었던 문장들이 꽤 남았다.

174 이제 조금 있으면 여명이 틀 시간이다. 나는 몇 개 남지 않은 카멜 담배 갑에서 담배를 꺼내 물며 물었다.
"자기 말처럼 내가 어린왕자면…… 자긴 여우야? 어린왕자에게 길들여진?"
"그건 좀 슬픈 비유다……. 어린왕자는 결국 떠나고 홀로 남겨진 여우는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는 어린왕자를 마냥 그리워하잖아……. 가엾잖아."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에 설핏 밖에 날씨와 같은 황망스럽고 쓸쓸함이 깃든다.
"그래도 여우가 어린왕자를 만나기 전에는 밀밭이 노랗게 익어갈 때면 자기를 잡으러 오는 여우 사냥꾼들을 먼저 떠올렸지만, 어린왕자를 만난 뒤로는 노랗게 익어가는 밀밭을 보며 여우 사냥꾼보다는 그리움의 대상인 어린왕자의 노란 머리를 먼저 떠올리잖아. 당장은 아니겠지만 어린왕자가 잊지 않는 한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거란 희망이 있잖아, 안 그래?"

216 한참 뒤, 미라가 여전히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말했다.
"내가 불자는 아니지만…… 불가에서 말하길 전생에서 수없는 인연이 있어야 이승에서 옷깃 한 번 스치는 인연이 있다는데, 그렇다면 자기와 난 전생에서 어떤 끝없는 인연들이 있었기에 지금 여기에 함께 있는 것일까?"

219 "내가 묻긴 했지만…… 뭐가 행복한 것일까?"
미라의 땅강아지 손이 여전히 옆구리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 잘은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 명사가 아니라 동사일 때라고 봐."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명사가 본인이 이루어낸 직위나 명예나 부라면, 동사는 명사를 이루어내기 위해서 하고 싶은 뭔가를 행하고 있는 상태인거지. 즉, 이루었을 때의 명사가 아니라 이루고자 하는 진행형일 때의 동사가 행복이 아닌가 싶어."

251 "왠지 숨기고 싶지 않았어. 그 사람에게 인간은 어느 누구나 가슴속에 침묵해야 하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무덤 몇 개쯤은 숨기고 산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는지도 몰라. 다른 사람이라면 결코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지만, 그를 위로해 주고 싶었을까…. 누구나가 무덤이 있다는 걸."

256 그때였다. 감기는 눈앞에 지금껏 마야에 있으면서 한 번도의식하지 못했던 소파 바로 옆 화병용 테이블 위 항아리에 꽂혀있는 한 무더기 벚꽃이 눈에 들어왔다. 삼촌이 가게 룸의 디스플레이를 위해 단골 꽃집에 부탁해 꽂아둔, 룸이 따뜻해 철이르게 핀 겨울 벚꽃이었다. 겨울에 보면 죽은 것처럼 앙상하게 말라붙어 보이는 가지에 어쩌면 저렇게 화사한 많은 꽃들을 숨기고 있었던 것일까. 이 겨울이 지나면 미라에게도 저렇게 꽃 피는 날이 올 것인가. 아니, 꼭 왔으면 좋겠는데, 죽은 듯 보였던 가지에서 봄이 오면 앞 다투어 피어나는 벚꽃처럼. 취한 눈에 어느 순간 미라의 얼굴과 겨울 벚꽃이 오버랩 되었다.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화병에 다가가 벚꽃 가지 하나를 꺾어왔다. 미라는 그런 나를 의아한 눈길로 쫓았다. 나는 꺾어온 겨울 벚꽃을 불쑥 내밀었다.
"뭐야?"
미라가 벚꽃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미라 너야. 지금 내 눈엔 니가 겨울 벚꽃처럼 보여."

264 그날 새벽, 미라가 한 말이다.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눈이 하늘을 보기 위해서는, 두 발은 냉혹한 현실인 똥밭을 밟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높은 이상을 말하면서도 똥을 밟는 건 싫어하고 두려워하는데 그건 아니라고 봐.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난 각오가 되어 있어. 내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얼마든지 진창길을 밟고 갈 거야."

279 사랑이란 존재할 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부재일 때 느끼는 것이다.

며칠 전 저녁 무렵, 영풍문고 광화문점에서 읽을 만한 책을 찾다가 표지가 예쁘고 사진과 글이 함께 있는 포토에세이 책장을 넘기다 발견한 글이었다. 왼쪽 페이지에는 남녀가 맞잡은 손만을 클로즈업한 흑백사진이 있고, 오른쪽 페이지 중앙에 있던 이 글에 강력한 자석에 이끌리는 쇠붙이처럼 눈길이 멎었다. 지금의 내 심정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책을 구입했고, 집에 와서도 몇 번이고 그 구절을 음미하며 읽고 또 읽었다.

280 그런데 몇 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 배경에는 어쩜 내가 모르는 그녀만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녀를 잊는다는 것은 어쩜 그녀를 나에게서 멀리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완전히 그녀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것이 내가 그녀를 찾으려 함에 있어 망설이는 이유이기도 했다.

10(첫 문장) 나는 오늘도 습관처럼 그녀를 훔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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