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나 춤 같은 건・・・ 보고 들으면 외울 수 있어..."
"어? 한 번 보면 외워?"
"응."
"바로 출 수도 있어?"
강유리는 기이한 물건을 보는 시선으로 나를 한번 훑어보더니 갑자기뚜르 앙 레르 동작을 선보였다. 남자 무용수들이 공중으로 솟구쳐서 두번 이상 회전한 다음 착지하는 화려한 동작이다.
"이런 건?"
강유리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어려운 기술인 데다가 남자 무용수 동작이라 배운 적이 없었다. 일단 눈을 감았다. 방금 본 동작을 떠올리고 느리게 재생시킨다. 발끝부터 다리, 허리, 가슴, 어깨, 목, 팔, 머리를 주르륵훑고 두어 번 반복해서 생각한다. 눈을 뜨고 강유리가 섰던 자리에 섰다. 떠오르는 영상 위에 나를 덧입힌다. 완전히 똑같이 하지는 못해도 동작의 포인트를 다시 재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원장 선생님이 애물단지인 나에게 미련을 못 버리는 이유 중 하나가 이 능력 때문이지 않은가.
그 애가 한 뚜르 앙 레르를 어설프게 따라 하자 강유리는 박수를 치면서경쾌하게 말했다.
유성
"전공생들은 너 싫어하겠다." - P62

"발레를 배우는 학생이 러시아 무용수 발레리 란트라토프에게 질문을 하나 했다. 무용을 잘하려면 팔과 다리 중 무엇이 더 중요하냐는 질문이었는데,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머리와 귀지. 무용은 정신 활동이야. 뇌는 귀가 음악을 듣도록 신호를 보내고, 팔과 다리는 이에 맞춰 움직여. 물론, 눈도 매우 중요하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강유리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너는 그 중요한 머리와 귀를 가졌어. 보고 듣는 대로 외워 버리니까.
그런데도 무대에 못 선다는 게 참 희한하다. 왜 무대에 못 서는 거야?" - P63

나는 그 뺨으로 다시 손을 뻗고 싶었다. 뜨끈한 열기가 닿으면 조금쯤 강유리의 ‘이상함‘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이, 꿈인데도 선명하게 들었다. 꿈이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니라 1인칭 시점이나 3인칭 시점이었다면 분명히 또 그 애의 뺨을 만졌을 것이다. 몸이 없기에 만질 수 없었고, 그저 지켜보는 것만 허락되었다. - P81

나는 머릿속에서 물방울처럼 떨어지기 시작하는 기억들을 필사적으로떨쳐냈다. 어느 순간에는 다정했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냉정하게 밀치고내리누르고 잡아당겼던 손길들을 떨쳐 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가슴이 조여드는 증상이 잠잠해졌다. 마지막으로 긴 한숨을 천천히 내쉬고, 다시 허리를 세웠다. 강유리가 진심으로 걱정이 된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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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뼛속에 아무도 짐작 못할 것들이스며드는 것을. 해질녘이면 대문간에 혼자 나가 서 있던 영혜의 어린 뒷모습을. 결국 산 반대편 길로 내려가 집이 있는 소읍으로 나가는 경운기를 얻어타고 그들은 저물녘의 낯선 길을달렸다. 그녀는 안도했지만 영혜는 기뻐하지 않았다. 아무 말없이, 저녁빛에 불타는 미루나무들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 P192

다만 기적처럼 고통이 멈추는 순간은 웃고 난 다음이다. 지우가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 그녀를 웃기고, 그녀는 문득 멍해진다. 어떨 때는 자신이 웃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더 웃기도 했다. 그럴 때 그녀의 웃음은 즐거움이라기보다 혼돈에 가까울 테지만, 지우는 그렇게 그녀가 웃는 모습을 좋아한다.
이렇게? 이렇게 해서 엄마가 웃었어?
지우는 그때부터 조금 전의 행동을 반복하기 시작한다. 입을 뾰족하게 모으고 이마에 뿔을 만든다든가, 콰당 넘어지는 시늉을 한다든가, 두 다리 사이로 얼굴을 끼우고는 "엄마, 어엄마" 하고 우스꽝스러운 억양으로 익살을 부린다. 그녀가 웃을수록 지우는 익살의 강도를 높인다. 마침내는 언젠가 통했다고 기억되는 모든 웃음의 비법들을 동원한다. 어린아이의 그런 필사적인 노력이 오히려 그녀에게 죄책감을 일으켜, 그녀의 웃음이 결국 흐려져버린다는 것을 지우가 알 리 없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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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작품을 완성해 이 테이프에 저장한 것이 벌써 이년 전의 일이었다. 이년이라면 치명적으로 긴 휴식은 아니지만, 내면을 초조하게 만들 수 있을 만큼의 공백이었다. - P72

그녀가 살았으면 하고 그는 바랐지만, 동시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그는 의문했다.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버리려 했던 순간은 인생의 코너 같은 거였을 것이다. 아무도 그녀를 도울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강제로 고기를 먹이는 부모, 그것을 방관한 남편이나 형제자매까지도 철저한 타인, 혹은 적이었을 것이다. 지금 그녀가 다시 깨어난다한들 그 상황이 변해 있을 리는 없다. 이번의 시도는 충동적이었지만 그녀는 다시 시도할 수도 있다. 그때에는 좀더 주도면밀하게 모든 것을 진행해, 이렇게 방해받는 일 따위는 없을 수도 있다. 문득 그는 차라리 그녀가 깨어나지 않길 바라고 있다는 것을, 다시 깨어난다는 상황이 오히려 막연하고 지긋지긋해, 눈을 뜬 그녀를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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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집사람이......."
"영혜가 왜, 무슨 일이라도 있나?"
장모의 음성에 걱정이 어렸다. 평소에 장모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던 둘째딸이지만, 자식은 자식인 모양이었다.
"고기를 안 먹는답니다."
"뭐라고?"
"고기를 전혀 안 먹고 풀만 먹고 삽니다. 여러 달 됐어요."
"그게 무슨 얘긴가? 다이어튼가 뭔갈 하는 건 아닐 테고."
"글쎄, 아무리 제가 말려도 듣질 않습니다. 덕분에 저도 집에서 고기맛을 본 지 오래됐습니다."
장모의 말문이 막혔다. 막힌 틈을 타 나는 쐐기를 박았다.
"집사람 몸이 얼마나 허약해졌는지 모릅니다."
"안되겠구만. 옆에 영혜 있으면 바꿔주게."
"지금은 자러 갔습니다. 내일 아침에 전화하라고 하겠습니다."
"아니야, 두게. 내일 아침에 내가 전화함세. 그애가 왜 안하던 짓을...... 자네한테 면목이 없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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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생활을 ‘시켜주면 좋겠다는 생각은 지금도 종종 한다. 카리스마 없는 내가 말 안 듣는 나를 돌보는 이 비극의 고리는 언제 끊길 것인가. - P300

대체로 만족스럽게 나이 들어가는 중에 아쉬운 것 한 가지는 나에게도 어른이 있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가끔 꾀병에 눈감아주고, 어제 소영이가 아파서 숙제(원고)를 못 마쳤다고 학교(출판사)에 전화해줄 어른 말이다. - P301

혹시 나는 ‘나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는 말 뒤로 숨었던 게 아닐까? 나 자신도 어른이면서 아닌 척하느라고, 겸손한 외양을 하고 존경하는 어른의 이름을 읊어온 것 아닐까? 그분들을 마음으로부터 공경하는 것과 별개로, 그렇게 ‘좋은 어른‘이 되는 건 먼 훗날의 일로 미룬 것 같다.
어른이 된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그 말은 ‘훌륭한 어른‘한테 여러 책임을 떠넘겼다는 뜻도 된다. 내 생각이 지나친 걸까? - P303

알고보니 어른의 어른은 알람이었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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