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은을 위해주었던 사람, 자은이 따르고 싶었던 사람, 처음부터 어쩐지 좋았던 사람이 한편으로는 겁탈자의 무리를 이끌수도 있다는 것을 자은은 받아들였다. 어그러짐을, 오염을, 곤죽이 되고 범벅이 된 온갖 것들을 평정하려 들지 않고 그대로삼켰다. 날뛰는 것들을 삼키고도 태연함을 내보이는 법을 배웠다. - P325

자은에게는 자은의 사람들이 늘었지만, 잠이 들었을 때는 홀로였다. 매가 새겨진 칼을 들고 조원전 앞에 서 있을 때의 꿈을 되풀이해 꾸곤 했다. 촉감까지 느껴지는 유난한 꿈들이었다. 칼은 자은의 손안에서 서늘했다가 뜨거웠고, 깃털 같았다가 무거웠다. 비명으로 가득한 꿈을 꾸고도 자은은 언제나 조용히 눈을 떴다. 죽은 자들이 질러대는 소리소리는 밖으로는, 아침으로는 새어나오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날을 더해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입버릇 같은 혼잣말을 거듭했다. 누구나 더이상 새날이 주어지지 않을 때까지 날을 더해가며 산다. 그뿐이다. 야단을 떨구석이라곤 하나도 없고 경망스러운 자들이나 달리 굴 것이다. 일어난 일들 일으킨 일들 모조리 품고 견디면 된다. 그럴수 있다.
말하다보면 믿기는 날도 더러 있었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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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내놓고 민주주의를 지킨 1980년 광주의 시민들이 있었기에 2024년 12월 3일 내란의 밤에 국회로 향하는 장갑차 앞을 가로막은 시민들이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는 이렇게 이어달리기를 하고 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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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진 뭘 좋아했는데요?
그냥...... 아무 일도 없는 주말에, 버스 타고30분쯤 가다가 대충 어딘가에 내려서 가방 내려놓고 책 읽고 그러면 좋았거든요. 아무 생각 안 하고그런데 요즘은 몸은 가만히 있는데 머릿속이 너무분주해요. 문제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게 불안이라는데. - P48

맞아요. 성아도 그게 불안이라고, 머리 말고 몸을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하면 그런 불안은사라진대요. 플래너 계약, 웨딩홀 계약, 드레스 예약, 사진 촬영, 신혼집 계약, 이렇게 쭉쭉쭉 가다보면 너무 바빠서 웨딩 업체의 부당한 갈취에서 오는 정확한 분노나 돈만 있으면 더 좋은 걸 할 수 있는데 돈이 없어서 더 좋은 걸 할 수가 없는 정확한 안타까움만 있고, 구름처럼 뭉게뭉게한 불안은 없대요. 이인삼각처럼 둘이서 그걸 다 해내고 나면 성취감도 든다고. - P49

팀장은 나에게 종종 의욕을 가지라고 말했다.
좀 도전적으로 뭔가 해봐, 모림 씨. 책임감을 가지라고. 하지만 책임감이라니. 양심 정도만 가지면안 될까요? 저는 양심적으로, 실수하지 않기도 힘든걸요. 그렇게 대답하지 못했다. 네, 노력할게요. 그렇게 말하고 또 고개를 끄덕끄덕. 그것도 얼마간의 진심이었다. 이제까지 해온 것과 다르게 뭔가를 바꿀 수 있을까? 회사에서? 나는 하루하루가 이미 무척이나 다르고, 그래서 매번 무척이나 진땀 나고 익숙해지지가 않는데, 사람들은 나를 무척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그 정도는 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것만은 모른다. 나에게는 그 반복적인 삶도 가뿐하지 않다는 걸. - P52

동시에 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바라는 게 실제로 성과를 내는 게 아니라 성과를 내보고자 하는 캐릭터로의 변신이라는 것, 그러니까 기세의 문제라는 것도 조금은 안다. 기세가 있었다면 달랐을까, 서른한 살까지의 내 인생은? 지금 나는 아직 세상이 너무 낯설지만 동시에 너무 많이 살아버렸다는 느낌이 드는 구간에 들어선 것일까?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할까? 2020년대가 시작된 이래로 사람들은 스스로를 미래의 인간이라고 생각할까? 전에 없이, 누구와 비교해도 영리하고 문명화되었다고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까? - P53

나는 큰 얼음에서 쪼개져 떠내려가는, 그러는동안 계속해서 조금씩 작아지는 얼음 조각에 탄 무리에서 가장 아둔한 펭귄 같다. 가끔 드는 조바심은 그런 것이다. 다른 얼음 조각에 닿을 수 있으면좋으련만. 두 얼음을 꼭 붙여, 녹았다가 얼게 할 수있으면 좋으련만. 조랭이떡 같은 모양으로 붙어 넓어진 얼음 위에서 누군가와 함께 흘러가면 좋으련만.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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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뤼드』의 주인공이 쓰는 글의 주인공 이름은 티튀루스이고 나는 이 인물이 써 내려가는 속마음이 마음에 든다. "나는 티튀루스. 혼자이고, 사색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 책처럼 풍경을 좋아한다. 내 생각은 슬프고, 진지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우울하기까지 하니까. 그래서 나는 내 생각을 무엇보다 좋아한다. 그리고내 생각을 산책시키고자 벌판을, 평온하지 않은 못을, 황야를 찾아 나선다. 그곳에서 내 생각을 천천히 산책시킨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두근거린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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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깨어 있으면, 잠의 옷자락 아래 기어들지 못하면...... 쫓기는 마음이 들지 않나? 그러니 비슷하게 눈이 벌건 이들과어깨를 나란히 하고 밤을 새우는 거지. 잊을 수 있으니까, 쫓기고 있다는 걸."
"무엇에 쫓기나?"
"지난날의 과오에 쫓기는 자가 많을 테고, 오지 않은 날들에 쫓기는 자도 더러 있을 테지. 어느 쪽인지만 명확히 알아도 덜 쫓길 텐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긍휼히 여기게 쫓기다 사로잡힌 자들을."
"자네는 어떻게 그 속내를 아나?"
"어른 없는 어린아이가 먹고 살려면 밤의 심부름꾼이 될 때가 있으니 아네. 밤 심부름꾼이 살아남으려면 사람의 무늬를 알아봐야 하고, 어느 바다 어느 땅에 가도 반복되는 무늬가 있다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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