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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그림 수업 - 그림 선생과 제주 할망의 해방일지
최소연 지음 / 김영사 / 2023년 7월
평점 :

『할머니의 그림 수업』은 각 장 별로 서 너 편의 짧은 글이 실려있고, 한 장이 끝나면 '할머니의 oo'이라는 제목으로 할머니들의 작품이 실려있다. 글이 차지하는 분량에 비해 책을 붙들고 있는 시간이 길었는데, 할머니들의 그림이 실려있는 페이지에 오래 머무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책은 미술가이자 예술감독인 최소연 작가가 제주의 선흘 마을로 이사 오면서 만들어진 그림 수업을 담았다. 청소년 대상으로 홍태옥 할머니 집 마당에서 드로잉 프로젝트를 한 게 시작이었다. 빈 이젤에 관심을 보이던 홍태옥 할머니가 처음으로 목탄을 손에 쥐고 그림을 그린 순간, 『할머니의 그림 수업』이 시작되었다. 대상은 1930년생~1940년생 할망들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제주 4.3을 겪어내느라 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자신을 위한 시간을 써보지 못했던' 여덟 명의 할망들이다.
그런 할머니들이 그림을 그리면서 속에 있던 말들을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것들이 조금씩 그림을 통해 밖으로 나오면서 말 그대로 해방이 일어난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지난 아픔을 돌아보고 그리움과 고마움을 표현한다. 자신의 일상과 마음을 살피기도 한다.

할머니들은 그림 곁에 일기를 쓴다. 그런데 간결한 문장에서 느껴지는 할머니의 시선이, 그 속에 담긴 삶의 내공이 예사롭지 않다. 어떤 것들은 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제주 방언의 영향도 있겠지만, 간결한 문장 속 느껴지는 운율과 율동감이 보통이 아니다.)
할망들에게는 채소 하나도 다 같은 채소가 아니다. 참외를 보고 상처 난 거도 버리지 말라며, 어떤 것은 상처도 나고 어떤 것은 곱게 자라지만 맛은 같다는 조수용 할머니의 그림과 문장은 내게도 큰 울림을 준다. 시장에 갈 수 없는 늙어 둔틀락둔틀락한 오이, 오이 따러 갔다가 딱 꺾어먹는 파치 오이, 상품으로 팔 수 있는 오이의 생김새도 다 다르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 친구에 대한 생각들도 적어낸다. 오가자 할머니는 <엄마한테 보내는 그림, 보리콩>을 완성한 후 그림 때문에 "울어진다"라면서 붓을 놓지 못했다고 한다.(p.147.)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옅어지지 않는구나 싶었다. 할망들에게는 각자 집에서 홀로 지내 외롭다가도 친구를 만나면 웃음이 끊이지 않는 소녀 같은 면모도 있다. 고순자 할머니에게는 친구가 '중한' 존재이다. 그만큼 일기 속에도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주변에 있는 사물들을 오래 바라보고 그림으로 그려내는 할머니들은 점점 더 예술가가 되어간다. 아들이 이리저리 가지를 잘라버렸지만 그림에는 원래 가지가 뻗어있던 대로 나무를 그리려는 모습, 빛바랜 모자의 옛 빛깔을 기억해 내어 그림에 담으려는 모습은 할머니들이 점점 더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앞으로의 행보가 더 궁금해지고 기다려지는 할머니의 그림 수업이다.
마음속에 말이
그림을 배우면
조금씩 나올 것 같아
부희순 할머니 2022.5.26.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