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 그런 나는 없다
홍창성 지음 / 김영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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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말 확고부동한 존재인가'라는 설명에 이끌려 선택한 이 책은 표지부터 강렬하다. 공空의 개념을 보여주는 듯한 백색 바탕에 무아無我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무아는 말그대로 '진정한 나'(자아)는 없다는 말이다. 자아에 대한 믿음을 격파하겠다는 저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아 개념에 대해 붓다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언어 철학, 심리철학 등의 서양 철학을 이용하여 차근차근 반박한다. <들어가는 말>에 써있듯 짧은 분량에 쉬운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내용에 대해서는 오래 생각해봐야 한다. 만물이 상호의존의 형태로만 존재한다는 ‘연기’, 대상은 스스로를 향할 수 없다는 ‘비재귀성의 원리’등 다소 낯설고 어려운 불교 개념들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직관적인 예시와 중간에 삽입된 이우일 작가의 일러스트가 이해를 돕는다.

 


우리는 생각보다 단어의 뜻을 제대로 모르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자아정체성이라는 단어, 자아를 찾아야 한다는 문장을 쓰며 그럴 듯하고 멋져보이는 말을 하지만 막상 자아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얼버무리게 된다. '변하지 않는 무언가, 진정한 나' 라고 답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홍창성 교수는 이런 모호함을 명쾌하게 해주었다. 이런저런 철학 용어와 어려운 개념이 있지만, 누구나 읽으면 끄덕끄덕하며 무리 없이 동의할 내용이다. 엉터리 의미로 ‘나’의 존재를 규정하고 싶지는 않으니 말이다.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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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에서는 자아라는 개념의 중심을 이루는 '불변하는 나'에 대해 반박한다. 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변하는 나’는 실재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해 뇌, 이름, DNA 그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불변하지 않으며 고유하지 않다고 말한다. 나의 본질을 구성하는 몸과 마음의 특성이나 나를 나 이외의 사람과 구분해 주는 개인적인 본질도 없다.

 

2장에서는 자아가 모순임을 논한다. 저자는 먼저 영혼soul 자아self 인격체person를 구분한다. 영혼은 종종 마음으로 이해되는데, 자연과학의 발달로 우리 마음은 뇌세포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전기자극과 화학반응에 의존하여 생기는 의식의 흐름일뿐이라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물리적 대상인 뇌가 없이는 의식을 가진 마음 또는 영혼이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자아self 와 인격체person에 대해서는 아래의 두 문장이 도움이 된다.


1) 그는 모진 고생 끝에 다른 사람 person(인격체)이 되었다.

2) 그는 모진 고생 끝에 다른 자아self(영혼)가 되었다.

p.49.

 

2)번 문장은 매우 어색하다.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일들로 (전쟁, 가족의 사망, 이혼 등) 성격이 많이 변하여 다른 인격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꽤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 다른 자아가 되었다고 하지는 않는다.

 

 

한편 우리가 불변한다고 믿는 자아는 개념적으로 모순이다. 어떤 것이 불변하기 위해서는 단순체여야 하는데, 단순체는 속성을 지니는 순간 복합체가 된다. 또 시간선상에 연속체로 존재하는 한 복합체가 되기에 단순체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불변하는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아의 목표는 '나를 내려놓는 것'이다. 그러나 무아를 받아들여도 내가 소멸되지 않는다. 붓다는 자아는 부정하지만 인격체로서의 나는 인정한다. 인격체는 오온으로 구성되는데, 오온은 끊임없이 변하는 몸과 네 가지 의식상태인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이 모여 쉬지 않고 변하는 하나의 묶음이다. 색수상행식은 순서대로 물질적 존재자, 느낌, 지각, 동력, 심신상태의 자각을 뜻한다.

 

 

그런데 전체 개념은 허구이다. 저자는 불교 초기경전에 있는 전차 예시를 든다. 전차라는 전체가 실재하는 게 아니라 단지 ‘전차’라는 이름 또는 지시어만 존재한다는 논의이다. 전차의 바퀴, 축, 널빤지, 깃대 등의 많은 부품 중 그 무엇도 전차 가 될 수 없다. 이것이 모두 모여 기능을 수행하기는 하지만, 부품이 연결 된 것이므로 전체라는 것이 실재할 수 없다. 따라서 오온이 모인 전체로서의 나 또한 허구이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내가 계속해서 변화한다면 미래를 위해 준비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저자는 이를 불교의 진제와 속제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진제는 궁극적 진리, 속제는 세속적 또는 실용적 진리를 의미한다. 이 세상에 부분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물건은 거의 없다. 수많은 부품으로 이루어진 대상들을 하나의 물체로 간주하면서 하나의 이름으로 가리킨다. 이를 통해 우리의 의사소통은 걸림없이 이루어진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실천과 관련된 행위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주는 진리를 ‘속제’라고 부른다.

 

 

이를 지금까지 논의된 나에 대한 개념과 연관 지으면 다음과 같다. 내가 비록 다섯 가지 부분의 묶음이고, 전체로서의 나는 궁극적으로 허구에 불과하지만(진제), 이 허구는 아주 쓸모 있는 허구이다(속제). 끊임없이 변하는 내가 미래를 위해 행동해야 할 이유 또한 속제에서 찾을 수 있다. 일상에서의 우리는 우리가 개인 인격체로 존재하며, 인격체로서의 우리는 각각 약 80년 정도 변하지 않는 동일한 인격체로 살아간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동일한 인격체로 존재하기에 미래의 ‘나’를 위해 행동하는 것이 정당하며 동시에 ‘공한’ 인격체임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책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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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변하는 자아는 없다는 내용에 동의하며 읽었다. 논리적으로 자아 개념을 반박하는 과정이 흥미로웠고, 낯선 불교 철학을 접하며 고민해보는 시간 자체가 즐거웠다.

 

‘나’에 대해 유독 집착하던 시기가 있었다. 진짜 나는 무엇인지 생각하다보면 쉽게 내 생각에 매몰되고 답없는 고민만 반복되었다. 지금은 진정한 나에 대한 물음을 잘 던지지 않는다. 어떤 부분은 변하고 어떤 부분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된 후, 조금 더 넉넉한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게 되었다. 인격체 개념을 내 식대로 정리하면 '변하는 나도, 변하지 않는 나도 다 나다!'가 되겠다. 생각해보면 이 문장도 한 드라마로부터 왔다. 저자의 말대로 역시 불변하는 나, 고유한 내 생각은 없다.

 

드라마 <도시남녀의 사랑법>의 주인공 은오는 전애인의 배신으로 충격을 받은 후 서울을 떠나 양양에서 과거의 소심한 모습과 180도 다르게 행동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이은오가 아닌 ‘윤선아’이며, 한없이 자유로운 영혼이다. 재원은 그런 선아와 사랑에 빠지는데, 어느 날 선아가 말없이 사라진다. 은오는 서울로 돌아와 원래 자신의 삶을 살아가다 재원과 우연히 마주치고, 거기서부터 드라마의 갈등이 시작된다. 그 중 15화에서 은오가 '재원이 내 바보 같은 모습을 알게 되는 것이 싫고, 난 옛날의 바보 같은 이은오 그대로'라고 하자 친구가 그에게 건네는 말이 인상 깊다. "은오야, 옛날의 너, 바보 아니었어. 옛날의 너도, 지금의 너도 넌 그냥 다 너야. 다 이은오야."

 

2년 전에 봤는데도 지금까지 떠올릴 만큼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드라마를 보면 알겠지만, 은오에게 선아의 모습도 여전히 남아있다. 은오는 그 자체로 매력적이고 사랑스럽다. 그러니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골몰하며 애쓰기 보다는 이런 저런 모양의 나를 받아들이고 아껴줄 일이다.

 

마지막으로 책에 대한 감상을 두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넉넉히, 여유과 빈공간을 가지고.

나는 언제든 변화할 수 있으니!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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