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낭콩
채도운 지음 / 삶의직조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강낭콩>



강낭콩은 보드라운 흙에

그 여린 몸을 묻을 수조차 없다.

고작 십 주도 못 품은 강낭콩은,

점조차도 못 되는 티끌인 나의 강낭콩은,

법적으로 태아가 될 수도 없고

시신으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처음 내 몸에 찾아오는 순간에도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가,

내 몸에서 강제로 내보내는 것은

법을 어기는 영역에 해당하고,

저절로 나오더라도

하나의 생명체로 존중받지 못하고

그저 의료 폐기물이 되어버립니다.

내가 품고 낳은 강낭콩은

분명 내 속에서 살아 숨 쉬던 존재였는데

왜 생명의 영역에 들지 못하고

그냥 버려져야 하는 것일까요.

산다는 것은 늘 돌봄의 연속이다.

정기적으로 손발톱이나 머리를 자르고,

먼지 쌓인 집안을 닦고,

키우는 식물에 물을 주는 것과 같이

늘 나와 주변을 돌봄으로써 삶이 영위된다.

그렇다면 돌봄을 받기만 하고 되돌려줄 수 없는 삶은

살아 있는 것일까?

자신을 소모하며

무작정 돌봄을 주기만 하는 이의 삶 또한

살아 있다고 볼 수 있는 걸까?

살아있다는 것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스스로 움직일 수도, 생각할 수도 없고

숨 쉬는 것조차 스스로 할 수 없다면

그에게 삶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요?

기계를 통해 숨을 쉬게 하고

음식물을 때마다 제공하고

몸이 망가지지 않게 수시로 뒤집어주면서도

과연 눈앞에 있는 나를 알아볼 수 있는지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면

나도 상대도 살아있다 할 수 있을까요?

나의 가족들이 나를 그렇게 돌봐야 한다면

당장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지만,

입장이 바뀌어 나에게 돌볼 사람이 생긴다면

쉽게 포기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매일 부단히 노력하는데, 바뀌는 내일이 없어.

늘 기울기가 한쪽으로 심히 기울어진 땅에서

달리고 있어.

달리면 달릴수록 기울기는 더 가파르기만 하는데,

그 끝에 서 있는 마음을 엄마는 이해해?

끝단에 서 있는 오늘이 내일도, 모레도, 그다음 날에도 반복되는 그 절망감을!

돌봄 노동이란

다른 이의 삶을 위해

나의 삶을 포기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나의 모든 것을 내어 놓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아니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나빠져가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 때문에

상황을 탓하고 상대를 탓하며

결국은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는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의 굴레.

이내 지영은 식물의 생을 거두는 게

어렵지 않음을 깨달았다.

배추에서 시든 배춧잎을 떼듯,

대파에서 뿌리를 제거하듯,

나무에서 병든 나뭇가지를 분지르듯,

실상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식물을 뽑아 버리고 화분째 버리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생명이 다 소진되지 않은 식물을 버리는 행위가

죄책감도 유발하지 않고,

이내 매우 자연스러워진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임신 중절 수술, 식물인간 등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결고 어둡거나 슬프지만은 않습니다.

생명 존중과 진정한 삶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어요.

살아가며 절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지만

이것은 내가 아니더라도

나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언젠가는 겪게 될 일들이기에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우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