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간 길을 지금 내가 간다."
이어령 유고 시집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천의 물결로 빛나는 강물이거나
천의 이파리가 흔들리는 수풀이거나
움직이는 것은 모두 다 아름답다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본다는 것,
소리가 나는 것을 듣는다는 것,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 맡는 모든 것이
하나하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것을 잃기 전에는
차마 그 고마움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것은 오래 생각하는 것이고,
참된 것은 오래 기억하는 것입니다
아빠가 귓가에 새소리를 내며 깨워주던 아침,
엄마가 미나리를 넣어 싸주던 향긋한 김밥,
오빠 졸업식에 온 가족이 함께 먹었던 자장면,
맞벌이 부모님 덕에
언제나 친구들의 아지트가 되었던 우리 집.
어린 시절 소중한 추억이 가득하니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추운 겨울, 새벽 길거리에서 신문을 배달하는
아이가 떨고 있었지요
길을 가던 여인이 물어보았지요
얼마나 추우니
신문 배달을 하던 아이는 대답했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추웠는데
'얼마나 추우니'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제는 춥지 않아요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을 바꾸고
말 한마디가 세상을 바꾸고
말 한마디가 내 마음을 바꾸어 놓습니다.
작지만 큰 힘을 가진 말 한마디.
내 아이가 추위에 떨지 않게 하는 방법은
남의 아이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이라는
선생님의 큰 뜻을 배웁니다.
선생님이 가시고 난 후
서점에서 선생님 관련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는
사랑하는 딸을 먼저 떠나보내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있어
보는 내내 눈시울이 붉어지게 합니다.
우리 시대 최고 지성으로 불린
이어령 선생님의 유작을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