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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구아 비바 ㅣ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6월
평점 :
'아구아 비바'는 '살아 있는 물'로 번역되고, 일반적으로 해파리를 의미한다. 작가는 이 제목을 통해 형체를 강제하는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 경계없이 자유로우면서도 유동적으로 변모하는, 그러한 '무엇', '그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 같다. 이것은 작가의 작품 활동에서 핵심 주제이기도 하며, 이 '소설'을 뚜렷한 '플롯'조차 존재하지 않는 탈장르적 '무엇'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읽는 일은 우선, 쉽지 않다. 보통의 독자들이 작품을 읽을 때 기대하는 구조, 형식, 질서를 작가는 철저히 파괴한다. 뚜렷한 플롯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니 당연히 '스토리'라 부를만한 것도 없다. 서술자로 등장하는 '나'라는 인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정보는 없다. 등장인물이라고 해야 '나' 외에 오로지 '당신'뿐이며 시간과 공간은 온통 뒤죽박죽이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나'가 지금 '당신'에게 글을 '쓴다'는 행위뿐이다.
'나'는 글을 쓴다. 글을 쓰는 것은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순간은 순간이라고 붙잡는 순간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간다. 이미 그 순간은 지나가버린 순간이 되어 버린다. 그렇기에 '나'가 쓰는 글은 어떠한 규정, 형태, 의미가 아니다. 말이 아닌 것이다. '말'은 단지 순간을 포착하기 위한 미끼가 될 뿐, 말을 포착한 순간 말은 내버려지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쓰는가. 영원히 계속되는 글쓰기를 쓴다. 그것은 매 순간, 자신을 넘은 자신까지 확장되는 일이며, 약동하는 생명을 온몸으로 느끼는 일이며, 존재하는 일이고, '있다'의 실재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나'가 붙잡으려는 '순간'은 일회적이고 단편적인 것이 아닌, 끝없이 지속되는 시간의 선線, 영원을 포괄하는 것이 된다. '순간'은 영원의 단면이며, 영원은 순간의 핵인 셈이다.
결국 '나'는 존재한다, 있다, 살아 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쓰는 행위의 핵심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란 어쩌면 바로 '나' 자신이기도 하며, 글을 읽는 독자-'당신'이기도 하다. '나'와 '당신'은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너머 '나'이기도 하고 '당신'이기도 하다. '나는 나이고, 당신은 당신이다'라는 소설 말미의 선언은, 자아와 타자를 경계짓는 구분이 아닌, '쓰는 행위'와 '읽는 행위'가 특정 대상과 산물을 생산해 내고 이해하고 분석하는 행위가 아닌, 오로지 지금 이 순간 존재하고 있기 위한 행위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는 것은, 보편의 독서가 기대하는 특정 의미, 깨달음, 형식과 구조를 파악하기 위함이 아니다. 순간을 포착하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통해 존재와 삶의 절박함을, 자유와 열정을, 끝없는 '나'의 확장을 느끼기 위해서이다.
작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1920년에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고, 러시아 내전을 피해 가족들이 러시아를 탈출할 때에 태어났다. '나는 자전적 이야기를 쓰려는 게 아니다'라는 작품 속 작가의 말처럼, 실제로도 그녀는 자신의 삶의 이력에 대해 언급한 일이 거의 없는데, 그럼에도 그녀가 했던 일부의 인터뷰를 통해 추측해 보자면 이렇다. 그녀의 어머니는 내전 중 성폭력으로 병에 걸렸다.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치료하기 위한 방법으로 새로운 생명을 낳아야 한다는 미신이 있었는데, 부부는 살아야겠다는 생존의 의지로 임신을 한다. 불가능할 것 같은 탄생, 생명, 건강.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바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이고, 고통 속에서도 부모는 이 아이를 지키며 기적처럼 탈출에 성공한다. 브라질로 가서 정착을 한다. 그녀는 신문 칼럼리스트로 일하다가 외교관과 결혼한다. 하지만 글쓰기의 지속을 위해 이혼을 하고 자녀들과 브라질로 돌아왔다. 큰 아들의 병, 불면과 중독, 경제적 고난, 그리고 화재 속에서 원고를 구하려다가 입은 화상, 결국 암으로 인한 사망까지. 탄생의 순간부터 절박한 생존과 존재의 증명을 운명처럼 지닌 작가가 '있음', 이 '순간'을 포착하여 '존재'함을 평생의 화두로 삼은 것은 어쩌면 당연하리라.
사실, 이러한 작가주의적 해석은 이 작품을 읽는 데에 아무 쓸모가 없다. 어쩌면 오히려 방해가 되리라. 작가는 "이것은 기차 창문으로 내다본 선로처럼 달아나는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고, "내가 당신에게 쓰고 있는 건 '이것'",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글쓰기임을 밝히고 있다. 모든 건 끝나지만 내가 당신에게 쓰고 있는 것은 계속 된다며, 가장 좋은 건 아직 쓰이지 않은, 행간에 쓰인 것이라 말한다. 그러니 작가는, 어쩌면 '당신'-즉 나 자신, 책을 읽는 이 순간의 독자에게, 지금 이 순간을 읽을 것을 권하는 것이다. 아직 쓰이지 않은 행간, 영원히 지속될 순간을 스스로 포착하고 온몸으로 느끼기를. 그것이 바로 '있음'이고, 생명이며, 존재임을, 말 너머의 말로 쓰인 책.
이 신비하고 매력적이며 사악하고 낯선 책을 존재를 갈망하는 모든 독자에게 권한다.
*책 너머의 책, 말 너머의 말, 생각 너머의 생각을 '이해'하지 않아도 감각할 수 있는 책.
*을유문화사 서포터즈로 선정되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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