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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채우는 감각들 - 세계시인선 필사책
에밀리 디킨슨 외 지음, 강은교 외 옮김 / 민음사 / 2022년 12월
평점 :
시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신만의 속도로 읽어야 하는 노래이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걸음을 떼는 것처럼 말이다. 한 구절, 한 구절을 세심하게 읽어 가는 목소리에는, 한 글자 한 글자 적어내려간 공책 위에는, 시가 있지만, 시가 아닌 자신만의 감정이 깃든다.
시는 그런 것이니까. 객관적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외부적 대상이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 대상의 특성을 각기 다르게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 단 하나가 아닌 늘 여럿인 것. 그러니 시를 읽는 일은 정해진 대상을 읽는 일이 아니다. 시를 읽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읽기 위한 통로로 가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시를 읽을 때에는 소리 내어 읽는다. 시를 영원히 기억하고 싶을 때에는 한 글자, 한 글자, 그 구절을 옮겨 적는다. 낭송과 필사는 시의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시 읽기의 한 방법들인 것이다.
필사 체험단,이라는 명목으로 책을 한 권 받았다.『밤을 채우는 감각들』.
민음사에서 출판한 이 필사책은 19세기를 대표하는 시인들, '에밀리 디킨슨', '페르난두 페소아', '마르셀 프루스트', '조지 고든 바이런'의 작품을 각각 십여 편 남짓 선정하여 수록하였다. 책의 양면에 한 면은 시, 다른 한 면은 여백으로 구성되었다. 시를 '읽는' 행위보다는 시를 '쓰는' 행위를 강조하는, 말 그대로 '필사책'이다.
예전에도 필사책들은 꽤 사 보았다. 시는 늘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야 하기에, 시를 읽다 보면 옮겨 쓰고 싶은 것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갖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을 알아서일까. 혹은 이 한 권의 책이 다만 작가의 완성된 작품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마음을 더해 완성되어야 한다는 의도인 것일까. 작가와 독자, 책과 책이 아닌 것 등 전통적인 경계들이 허물어지고 '메타'의 개념들이 각광받는 요즘 시류의 반영인 것일까. 아무튼 내 입장에서는, 당신만의 책을 완성하길 바라는 시도로 읽혔다. 그러고 보면, 『밤을 채우는 감각들』이라는 책의 제목은 시인의 감각이기도 하지만, 독자의 감각을 더해야 밤을 '채울' 수 있다는 뜻인 지도 모르겠다.
에밀리 디킨슨이야 수수께끼의, 신비한 여류 시인으로 각광받는 작가이고. 흥미로운 것은 '페르난두 페소아'와 '마르셀 프루스트'이다. 천재 시인이라는데, 내가 제일 먼저 읽은 페소아의 작품은『불안의 책』이었기에 내게 페소아는 (마치 우리나라 황순원 작가처럼) 시적인 문체로 소설을 쓰는 작가로 각인되어 있다. 프루스트 또한 여전히 넘지 못하고 있는 나만의 장벽,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장편의 장편을 쓴 소설가가 아니던가.
그들의 시를 하나씩 옮겨 쓰다 보면, 19세기의 천재, 낭만주의의 대가들은 시에서 비롯된 삶을 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의 소설이 잊히지 않는 여러 장면들로, 강렬한 이미지로 남는 까닭도 말이다. 쉽게 맛볼 수 없는 세계 시를 이런 기회에 접하게 되어 흥미롭다.
다만,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건 '시'니까. 원어로 작품을 같이 실어주면 어떠했을까라는 욕심이 남는다. 비록 내가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등 그들의 원어에는 까막눈일지라도. 심지어 그 글귀를 발음할 수 없다고 해도 원어 그대로 더듬거리며 읽고 쓸 때, 더욱 그 낯설고 신비로운 울림을 느껴보고 싶다. 페소아는 '나는 포르투갈어로 쓰지 않는다. 나는 나를 쓴다'고 읊었지만, 그러니 언어 따위가 무슨 상관이 있겠나 싶을 수도 있지만. 서사가 있는 소설이 아닌, 운율이 살아야 할 시에 있어서는 우리말로 된 번역의 시가 음악성이 아닌, 의미 전달에만 치우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시를 낭송하고 필사해야 한다면, 시인이 썼던 본래 그 언어,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해도 느낄 수 있는 그 원어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더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