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는 프랜시스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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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의 강물 위로 부유하는 어렴풋한 형체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범죄의 냄새가 풍기는 듯하다가 이내 전혀 다른 길로 인도한다. 마쓰이에 마사시는 의도적으로 기대를 빗나가게 하고, 그 틈으로 삶과 사랑, 그리고 자연의 숨결을 밀려오듯 흘려보낸다.

주인공 게이코는 서른다섯. 도시의 질서를 벗어나 낯선 마을 안치나이에 정착해 우편배달을 시작한다. 누군가의 하루를 담은 편지를 배달하는 일은 단조롭지만, 동시에 삶의 맥박을 가장 가까이서 듣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던 중 만난 데라토미노 가즈히코는 마치 다른 시간대에 사는 인물 같다. 그는 세상의 소리를 수집하며, 게이코가 잊고 있던 감각의 결을 깨운다. 그와의 만남은 게이코의 삶을 불쑥 불타오르게 하지만, 동시에 더 깊은 수수께끼 속으로 그녀를 밀어 넣는다.

마쓰이에의 문장은 언제나 자연을 배경이 아니라 인물처럼 세운다. 눈이 흩날리고, 바람이 밀밭을 스친다. 청량한 공기와 햇볕의 냄새가 페이지마다 배어 있다. 계절의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게이코와 가즈히코의 관계 역시 자연의 리듬과 함께 고요히, 그러나 불가피하게 무르익는다. 그들의 사랑은 젊은 날의 격정이 아니라, 이미 삶의 무게를 짊어진 어른들의 사랑이다. 그래서 더 서늘하고, 그래서 더 진실하다.

특히 ‘프랜시스’라는 존재는 기묘하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 놓인 듯 불분명한 이 이름은, 두 사람의 관계를 지탱하는 비밀스러운 장치이자 동시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리 없는 등장인물 같다.

마쓰이에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문득, 내가 무심히 지나쳐온 감각이 되살아나는 순간을 맞닥뜨린다. 스치는 바람의 결, 오래 묵은 나무의 촉감, 그리고 사랑하는 이가 내 곁에 있다는 단순한 사실의 온기. 이 모든 것이 언어로 정제되어 내 마음을 부드럽게 두드린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서 이미 보여주었던 섬세한 필치는 《가라앉는 프랜시스》에서 더욱 농밀해졌다. 도시를 떠난 한 여인의 연애를 따라가며, 인간의 삶과 자연, 그리고 감각의 힘을 다시금 증명한다.

책장을 덮고 나면, 이상하게도 옆에 있는 사람의 숨결이 새삼 귀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아마 그것이 마쓰이에 문학의 마력일 것이다.


#가라앉는프랜시스 #마쓰이에마사시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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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한 삶
이서현 지음 / 열림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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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지원도서


안락사라는 주제를 다루는 소설은 흔히 무겁고 차갑게 느껴지지만, 『안락한 삶』은 오히려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결을 품고 있어 여운이 오래 남았다. 이 작품은 죽음을 금기시하거나 단순히 비극적으로만 그리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권리’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점에서 특히 인상 깊었다.

무엇보다 강하게 다가온 건 ‘가족이 된다는 것의 의미’였다. 혈연의 낯섦과 함께 찾아온 이복동생 영원은 단순히 보호 대상이 아니라, 미래 자신에게 죽음의 권리를 묻는 존재가 된다. 죽음을 허가받기 위해 AI와 제도 앞에 서야 하는 소녀의 모습은 차갑고도 불합리하지만, 동시에 지극히 현실적인 풍경처럼 다가왔다. 그 속에서 ‘동의’라는 형태는, 누군가의 삶과 죽음을 존중하는 가장 근원적이고 용기 있는 태도임을 알게 된다.

안락사에 대해 이제는 필요하다는 입장인 나에게 이 소설은 일종의 '설득'처럼 읽혔다. 죽음을 택한다는 건 단순히 고통을 피하려는 행위가 아니라, 남은 시간과 자기 존재를 끝까지 존엄하게 지키려는 선택일 수 있다는 것. 영원이 바랐던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자기 결정을 인정받고 싶다는 소망이었다. 그리고 미래가 마침내 그 바람 앞에 서는 순간, ‘죽음을 허락하는 사랑’이라는 어려운 문장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안락한 삶』은 결국 안락사를 말하는 동시에, 살아 있는 자들의 윤리와 용서, 그리고 남겨진 자들의 무게를 이야기한다.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하지만, 읽다 보면 지금 우리의 사회와 가족 안에 놓인 문제들이 그대로 비친다. 무엇보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유머와 따뜻함을 놓치지 않는 작가의 시선이 끝까지 책을 놓지 못하게 한다.

나에게 이 소설은 "죽음조차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선택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해준 작품이었다. 동시에, 사랑은 증명이 아니라 ‘동의’일 수 있다는 문장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안락한삶 #열림원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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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 - 장영희가 남긴 문학의 향기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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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지원도서




책장을 펼치는 순간, 오래전 잃어버린 목소리가 다시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건네는 듯하다. 장영희 교수님의 문장은 늘 그렇듯 화려하지 않고 담백하면서도 따스하다. 마치 삶의 가장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진심을 조용히 내어주는 것 같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래지만, 글을 읽는 동안만큼은 꽃비처럼 내리는 그리움 속에서 다시 만나는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



문학을 생의 근원적 힘이라 여겼던 그녀의 고백은, 지금도 우리에게 “삶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진다"라는 단순하면서도 위대한 진실을 일깨워 준다. 크고 거창한 꿈보다 매일의 소소한 웃음, 따뜻한 시선, 곁에 있는 사람들과 나누는 사랑이야말로 진짜 삶의 기적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녀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일상 속에서 얼마나 섬세하게 사람들을 바라보았는지, 또 얼마나 유머러스하게 자신을 다독이며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문학 칼럼 속에는 영문학자이자 번역가로서 그녀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더 읽고 싶다’는 갈망을 남긴다. 책 속의 그녀가 내 손을 잡고 도서관으로 이끄는 듯 따뜻하다.



무엇보다도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그녀의 목소리 속에 여전히 살아 있는 희망이다. 목발을 짚고 걸어야 했던 삶의 무게 속에서도, 장영희 교수님은 ‘사랑’과 ‘기쁨’을 노래하는 언어를 선택했다. 그녀는 “신문에 없는 말들”을 이야기하며, 세상에 더 자주 흘러나와야 할 단어는 권력이나 사건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마지막까지 강조했다. 그 바람은 이제 내 마음에 심어져, 매일의 언어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책을 덮은 후에도 찻잎을 띄운 향기처럼 남는 여운은, 그녀의 삶과 글이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내 스스로가 문학의 한 부분이 된 듯하다"라는 고백처럼, 장영희 교수님은 문학 속에,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머물고, 우리는 그 문학을 읽으며 여전히 그녀와 함께 숨 쉬고, 함께 걸으며, 함께 살아간다.



해마다 봄꽃처럼 다시 피어나는 이 책은, 그리움의 빛깔로 물든 축복 같은 선물이다. 그녀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우리도 조금 더 따뜻해지고, 조금 더 용기 있게 오늘을 살아가게 된다. 그것이 장영희 교수가 남겨준 가장 큰 사랑이자, 꽃비 같은 유산일 것이다.




#이아침축복처럼꽃비가 #장영희 #샘터사 #일파만파독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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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키메라의 땅 1~2 세트 - 전2권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김희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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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제본지원도서



핵으로 뒤덮인 대지 위에서, 인간의 오만은 마침내 한계에 다다른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키메라의 땅』은 그 폐허 위에 새로이 피어나는 생명 ― 인간과 동물의 혼종, 키메라 ― 의 운명을 따라가는 장대한 이야기다. 



소설은 진화생물학자 알리스 카메러가 주도하는 ‘변신 프로젝트’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그는 하늘을 나는 에어리얼, 땅을 파고드는 디거, 바다를 유영하는 노틱을 설계한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언제나 그렇듯, 변화와 다름을 환영하기보다 배척한다. 결국 핵전쟁으로 인류는 스스로를 몰락시키고, 아이러니하게도 알리스의 실험적 창조물들만이 폐허 위에서 새로운 주인이 될 자격을 얻게 된다. 이 아이러니야말로 베르베르가 던지는 냉정한 메시지 아닐까.



베르베르는 늘 거대한 스케일의 서사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되묻는다. 『개미』에서 미시적 세계를 통해 인간의 오만을 비추었다면, 이번에는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신인류의 시선에서, ‘인간이란 종이 과연 특별한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흥미로운 점은, 키메라들의 존재가 괴물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다양성의 가능성으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하늘, 땅, 바다 ― 지구를 이루는 세 요소에 각각 적응한 그들은 자연과의 관계를 다시 묻는, 하나의 새로운 답안지처럼 보인다.



읽는 내내 서늘한 공포와 동시에 묘한 희망이 교차했다. 인간의 파괴적 본성이 결국 제 종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전망은 더 이상 소설적 과장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종의 경계가 무너지고 뒤섞이는 과정 속에서 태어나는 또 다른 생명들은, 우리를 대신해 새로운 지구의 주인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인류의 종말일까, 아니면 지구 생명사의 또 다른 진화일까?



『키메라의 땅』을 덮으며 남는 것은 경이와 두려움이 뒤섞인 침묵이다. 우리가 ‘끝’이라고 부르는 자리에, 어쩌면 또 다른 시작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인간의 시작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지구라는 오래된 행성은, 여전히 생명의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




#키메라의땅 #베르나르베르베르 #열린책들 #가제본서평단 #키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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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가지 테마로 읽는 도시 세계사 - 철학의 도시 아테네부터 금융의 도시 뉴욕까지 역사를 이끈 위대한 도시 이야기 테마로 읽는 역사 9
첼시 폴렛 지음, 이정민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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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지원도서


도시의 역사는 곧 인간의 역사다. 나는 늘 도시를 거닐며 시간의 결이 느껴지는 장소에 머물기를 좋아한다. 오래된 돌길, 닳은 계단, 때로는 지하철역 벽면에 무심히 걸린 사진 한 장에도 이야기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걸 느끼곤 한다.


이 책은 1만 년의 세월을 40개의 도시로 나누어 보여준다. 고대 여리고의 부장품에서 권력의 흔적을 읽고, 괴베클리 테페에서 종교가 농경에 앞섰다는 통념을 뒤집는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문명의 기원’이라는 물음 앞에 서게 된다.


개인적으로 초기 도시들 이야기가 가장 흥미로웠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농업이 시작되고, 우루크에서 최초의 문자가 탄생한 이유가 곡물의 회계 처리 때문이었다는 설명은 문명이 얼마나 실용적인 문제 해결에서 출발했는지를 보여준다. 모헨조다로의 상하수도 시설이나 공중목욕탕이 로마보다 앞섰다는 대목에서는 오래된 세계가 지닌 정교함과 우리 인식의 편협함을 동시에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정보 나열에 그치지 않고, 도시별로 인구 밀도, 개방성, 재정 안정성이라는 ‘혁신의 공식’을 통해 공통점을 짚어내고, 각 도시가 만들어낸 고유한 문화적·사회적 에너지의 흐름을 섬세하게 추적한다. 피렌체에서는 금융업과 예술 후원이 어떻게 르네상스를 열었는지를 보여주고, 아테네에서는 외부 사상과 기술을 유연하게 받아들인 개방성이 철학과 민주주의의 탄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짚는다. 이러한 서술은 우리가 ‘도시’라는 공간을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는다.


종교적 중심지였던 괴베클리 테페나 고대 도시들의 권력 구조는 과연 자유로운 개인을 존중했는가? 실제로 많은 문명은 배제와 통제, 때로는 폭력과 결속의 논리 위에 세워져 있었으며, 오늘날조차 ‘문명화된’ 도시 안에서조차 약자의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다.


인간이 과거의 자신보다 조금은 나아지려는 움직임을 도시라는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시도해왔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마치 도시가 끊임없이 갱신되는 장소인 것처럼, 인류도 스스로를 개선해나갈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 말이다. 그리고 그런 희망은 피렌체의 공방, 볼로냐의 교실, 아테네의 광장에서뿐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골목과 광장에서도 자라고 있을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 실린 15가지 ‘토의를 위한 질문’은 이 여정을 마무리하면서도 다시금 사유의 시작점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도시를 사랑하고, 도시에 깃든 시간과 사람을 아끼는 이들이라면 이 책은 분명 깊은 울림을 줄 것이다. 책장을 덮고 난 지금, 나는 다시 한번 내가 사는 도시를 거닐며, 이곳에서 만들어질 다음 이야기를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상상이, 곧 우리의 미래일지도 모른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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