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선국왕 이야기
임용한 지음 / 혜안 / 1998년 5월
평점 :
#1
나온지도 꽤 됐고, 알 사람은 다 알법한 책입니다만 저는 이제서야 접하게 됐습니다.
#2
일부 식민사학의 사생아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조선은 참으로 많은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는 말할 것도 없고 개인이나 문중의 문집들도 그 양이 상당하지요. 그렇다보니 삼국사나 고려사에 비해 교양서도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교양서가 많이 나온다고 해서 그 질을 보장하지는 못하지요. 특히나 최근에는 이x일 류의 자극적인 제목과 자극적인 해석에 치중한 교양서들이 많습니다. 그것도 역사 해석의 한 방향이니 모두 배제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썩 좋게 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실 대중들에게 재밌게 다가가면서, 책 내용에서 다룬 역사적 사실에도 큰 결함이 없으며, 더불어 참신하거나 곱씹을만한 해석이 첨가되는 교양서는 만들어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비단 역사학만의 문제는 아니겠습니다만. 그래도 몇몇 의식있는 학자들의 노력으로 양서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으니 저 같은 일반인들은 행복할 따름이겠지요.
#3
<조선국왕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조선 국왕들에 대한 일대기입니다. 소재 자체는 사골에 가까울 정도로 많이 다루어진 소재이긴 합니다. 하지만 <조선국왕 이야기>는 해석에 있어서 참신하고, 때로는 조금 과감하며, 무엇보다 재밌습니다. 사실 전공을 교양으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내용의 유의미함'과 '재미' 사이에서 어떻게 줄타기를 하느냐 하는 것일 겁니다. 전자만을 추구하다보면 지루해지고 어려워지기 쉽상이고, 후자만을 추구하다보면 무리한 해석이나 자극적인 해석에만 집착해 아전인수와 견강부회를 일삼게 되지요. 그런의미에서 <조선국왕 이야기>는 아주 적절하게 줄을 타고 있습니다.
기본적인 내용은 실록을 바탕으로 하되, '용재총화', '연려실기술'등도 두루 살피고 야사와 신화, 민담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다만 조선사를 전공한 학자답게 사실 여부가 명확치 않은 사료일 경우 그것이 야사나 민담의 영역이라는 것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교양서가 범하기 쉬운 우를 잘 피한것이지요.
#4
조선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에피소드도 있지만, 일반인의 경우에는 쉽게 알지 못하는 에피소드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나열하는 유혹에 빠지기보다는 그 에피소드가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의 근거가 될 경우에 주료 인용됩니다. 한 꼭지만 따와서 소개해보겠습니다.
...조선의 국왕들은 빠짐없이 불교문제로 유신들과 언쟁을 벌였다. 이 기록들을 모아보면 저마다 개성이 잘 드러난다 ▶훌륭한 무장이기는 했지만 학문은 부족했던 태조, 문자를 써가며 척불론을 주장하는 젊은 문신에게 아주 간결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대응한다 - "이색도 불교를 믿었다. 네가 이색보다 잘났느냐."
▶순진하고 우직했던 정종-"불교의 원리는 자비인데, 자비가 나쁜것은 아니지 않느냐. 귀신이 허망한것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효험은 있다. 내가 전에 부처에게 기도하던 사람이 신이 들리는 것을 봤다"는 식의 초보적인 논리를 펴다가 문신에게 깨진다.
▶술수를 좋아했던 태종, 절묘한 핑계를 대며 빠져나간다-"나도 불교가 허망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중국이 불교를 신봉하고 있으니 우리가 아주 탄압할 수 없다."
▶터프가이를 지향했던 세조, 신하가 부처를 비난하자-"칼을 가져와라. 내 저놈을 죽여 부처에게 사죄하겠다."
그러면 우리의 세종은 어떻게 했을까? 간단하다. 그 학구적인 자세와 논리로 사람을 복잡하게 하고,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져 입을 막는다.
"석가의 설교는 진위를 알 수 없는 것인데, 역대의 호걸스러운 임금들이 지금까지 불교를 다 없애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 마음을 깨끗이 하고 탐욕을 적게 내는 것을 도로 삼는다는 것은 도와 비슷한 소리지만 바른 도는 배우지 않고 그른 도를 근본으로 내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 그 교리란 이치에 가까운듯 하면서도 진리를 크게 어지럽히는 것이다."
불교를 공격하는 말 같지만 세종의 숨은 뜻은 불교에는 이런 문제가 있으니, 불교를 공격하려면 이런 수준에서 연구를 해서 공격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 연구해서 대답하려면 유학공부를 그만두고 불교학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임용한, 『조선국왕 이야기 』, 혜안(1998), pp.160~161
이정도면 교양서로서의 재미는 충분히 담보하고 있으면서도, 이 꼭지의 주제인 세종의 화법과 성격을 여실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이 저자의 역사관이 매우 마음에 듭니다. 마찬가지로 한 꼭지를 따와보겠습니다. 대마도 정벌에서 조선 상륙군의 추태를 목격한 중국인 포로를 명에 송환할 것인가의 여부로 갑론을박하는 장면 이후의 서술입니다.
옛 사람의 소심증을 비웃지 말자. 정말 소심한 사람은 따로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관념에는 역사란 자랑스럽고, 우리의 기상을 고양시키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알게 모르게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70년대 이후로 진취적 기상과 뭐 그런것을 좋아하게 되면서 역사를 뒤져 이런 기록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보니 창피한 이야기는 빼고, 사건의 일면만을 이야기하거나, 심하면 결론만을 강조할 뿐 사실과 배경설명을 빼 버리는 경우가 발생했다. 대마도 정벌이 바로 그런 예의 하나이다. 대마도 정벌을 했다는 서술은 많으나 그 진상을 적어 놓은 책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중략)...호연지기도 좋고, 정신보양도 좋지만 그것이 역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지나치면 역사가 소재와 결론 중심으로만 흐르고, 사실 분석이 빠져 버린다. 역사공부를 왜 하는가? 따지고 보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와 분석 능력을 고양시키는 것이 제일 가는 목적이요 기능이다. 어떤 훌륭한 명분을 사용한다고 해도 이 부분을 사장시켜 버리고, 결과만을 선전하는 플랜카드 역할만 한다면 역사라는 이름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 같은 책, pp.137~138
#5
현재 이 책은 2권, 그러니까 중종 까지만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책들을 집필하고 계신데요, 저자의 전공이 여말선초기였고 후기로 갈수록 검토해야할 기록이 많아서 시간을 길게 잡고 있다고 합니다. 다 나오지 못한게 아쉽기는 하지만 충분히 부담없이 읽으실 수 있는 좋은 역사책이라 생각합니다.
#뱀발
그동안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서 '비전공자가 이렇게 역사에 대해 참신한 시각을 가질 수 있구나'라는 사실에 감탄하면서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런데 <조선국왕 이야기>를 읽으면서 해석적이나 서술적인 면에서 겹치는게 많더군요. 찾아보지는 않았는데, 아마 참고문헌에 있을것 같고 박시백씨 역시 큰 얼개를 이 책을 중심으로 잡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박시백씨의 노력이 폄훼되는 것은 결단코 아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