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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ㅣ 행복한책읽기 작가선집 1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은 중단편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표제작인 <네 인생의 이야기Story of your life>에 관한 리뷰글입니다.
글의 특성상 스포일러가 있으니 읽지 않으신 분은 스크롤 내리는걸 멈춰주세요^^; 편의상 반말로 하겠습니다.
1. 작가 및 작품 소개 작가 테드 창은 많은 평론가들과 작가들이 ‘SF계 최고의 현역작가’로 주저 없이 꼽는다. 그도 그럴 것이 1990년 데뷔 이래 9개의 중단편에 불과한 창작빈도에도 불구하고 작품 하나하나를 발표할 때마다 평단과 독자층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여러 개의 상을 휩쓸다시피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1990년 발표한 데뷔 단편 「바빌론의 탑」은 역대 최연소 수상이자 데뷔작에 의한 최초 수상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며 네뷸러 상(주1)을 수상하였다. 「네 인생의 이야기」는 테드 창이 1998년 발표한 중편소설로, 물리학의 변분원리를 언어학과 접목시켜 인간 체험의 한 측면을 묘사한 작품으로 현역 언어학자가 ‘흠잡을 곳이 없다.’라고 평하였을 정도로 그 과학적 엄밀성을 인정받았다. 이 소설은 네뷸러 상과 시어도어 스터전 상(주2)을 수상하였다. 국내에는 중단편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Stories of Your Life and Others』로 출간되었으며 SF 독자층이 척박한 국내시장에서 10쇄가 넘어가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다.
2. SF에 대한 이해
SF는 장르문학의 일종이다. 장르문학이란 창작자와 수용자가 직관적으로 공유하는 일련의 서사관습conventions와 규약들protocols로 이루어진 서사양식을 말한다. 장르문학이 아닌 문학을 본격문학, 순수문학 혹은 주류문학이라고 분류하는데 이러한 구분에는 장르문학은 ‘본격문학’에 미달한다거나 ‘본격문학’은 장르문학보다 더 수준 높은 문학이라는 고정관념이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선입감에 대해서 시어도어 스터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SF의 90%는 쓰레기이다. 그러나 모든 것의 90%는 쓰레기이다.’ 그러나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의 가치론적 위계화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SF는 어떤 소설들을 일컫는 것이며 장르를 특징짓는 구체적인 특징은 무엇인가? 물론 현대 SF문학은 역사가 1세기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학자들 사이에서도 비슷하게나마 일치된 견해는 없다. 흔히 SF를 Science Fiction으로 한정짓는데 이러한 견해는 이제 와서는 SF문학의 포괄성을 아우르기에는 곤란한 용어이다. 그렇다면 SF는 무엇이라 정의해야 하는가?
우선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SF작가이며 흔히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SF작가의 1순위로 꼽히곤 하는 어슐라 르 귄Ursula K. Le Guin이 SF와 환상문학Fantasy까지 아울러서 표현한 것을 살펴보자. 그녀는 ‘인간이 알고 있는 세상은 실제로는 깨어 있는 낮 동안의 모습일 뿐이다. 인간이 잠자고 있는 밤에도 세상은 존재하며, 사실은 밤의 세계야말로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엄연한 이 세상의 절반인 것이다.’라며 본격문학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낮 동안의 세상 모습이라면, SF나 환상문학에서 다루는 내용은 밤의 세계이라 말하였다. 따라서 SF는 밤의 언어로 쓰인 작품이라는 것이다.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자유분방한 상상력, 폭 넓은 시각, 더 긴 안목’이라는 개념을 충분히 포괄하고 있다. 영국의 대표적인 SF작가이자 평론가인 브라이언 올디스Brain W. Aldiss가 내린 정의로 ‘SF는 우주에서 인간의 정의와 그 위상을, 혼란스럽지만 진보하는 지식 체계 안에서 추구하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 정의에서 가장 방점을 찍어야할 부분은 바로 ‘진보’라는 부분이다.
테드 창은 2009년 한국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판타지와 SF의 차이점을 물어보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판타지는 자기회귀적 세계를 쓴다면, SF는 진보하는 세계를 쓴다.’ 그는 스타워즈를 예로 들며 설명했다. ‘스타워즈에서는 악의 제국이 정의를 숭상하는 루크 스카이워커와 제다이들에 의해 무너지고 우주의 평화가 찾아오는 것으로 끝나는데, 단지 광선검과 우주선이 나온다고 해서 SF는 아니다. 이것은 무대가 우주인 중세 기사도 이야기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SF는 다르다. 고전 SF작품중에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기계가 개발된 세상이 나온다. 처음에는 정부에서만 비밀리에 이 기계를 쓰지만 주인공 일행에 의해 기계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고 결국 모든 사람들이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기계를 가지게 된다. 만약 판타지였다면 주인공 일행이 정부소유의 기계를 부수면서 세상은 기계가 있기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SF는 그리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이 유토피아이건 디스토피아이건 계속 진보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설명에 추측할 수 있듯이 SF는 단순히 ‘과학’을 소재로 삼은 소설이 아니다. SF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바탕으로 세상에 대한 상징이나 알레고리를 다루는 ‘진보하는’ 문학장르이다. 그리고 테드창의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는 바이다.(스타워즈를 예시로 든 테드창의 견해에는 이견이 있을수도 있지만, 아마 테드 창이 스타워즈 EU를 모두 보고 그런 이야기를 했을것 같지는 않다. 스타워즈 팬분들은 아량한 마음으로 참아주시길)
개인적으로 SF를 Science Fiction(과학 소설)이나 Speculative Fiction(사변 소설) 혹은 Structural Fabulation(구조적 우화)(주3) 등 어떤 것으로 정의하건 간에 SF 장르의 가장 고유한 특징은 ‘경이감Sense of Wonder’ 존재라 생각한다. 『The Oxford Dictionary of Science Fiction』 에서는 경이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SF를 읽음으로써 가능성에 대한 개인의 인식의 확장이나 시공간의 광대한 대립을 통해 촉발되는 경이감 혹은 각성의 느낌’이 바로 경이감이다. SF 평론가인 데이비드 하트웰이 ‘SF가 가지고 있는 흥분의 근원’이라고도 한 이 경이감의 존재야말로 SF의 장르적 특징이라 생각한다.
3. 작품분석
「네 인생의 이야기」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지구 궤도상에 우주선들이 등장하고 목초지에 거대한 거울이 등장한다. 주인공인 루이즈 뱅크스는 언어학 박사로 미군의 요청으로 모종의 프로젝트에 참가한다. 체경이라 부르는 그 거울은 일종의 통신기구로서 헵타포드라 이름붙인 외계인과 영상으로 교신할 수 있는 도구였다. 루이즈는 동료 물리학자인 게리 도널리 박사와 함께 헵타포드와 대화를 시도한다. 루이즈는 햅타포드의 언어와 문자를 분석하면서 마침내 그들의 문자를 사용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갑자기 왔던 것처럼 떠나게 된다.’ (이하 서사 A)줄거리만 보면 외계문명과의 접촉과 그것에 의해 파생되는 경이감이고 이것은 상당히 고전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네 인생의 이야기」는 하나의 서사가 더 있다.(이하 서사 B) 자신의 딸에게 말을 거는 형식이면서 미래시제를 취하고 있는 서사이다.
나는 네가 열두살이 되었을 때 네가 말하는 너의 탄생 시나리오를 기억해.
“엄마가 나를 낳은 이유는 단 하나, 월급 안 줘도 되는 하녀를 들이기 위해서야.”
벽장에서 진공청소기를 끄집어내면서 너는 쓰디쓴 어조로 이렇게 말하겠지.
“맞아.” 나는 이렇게 대답할거야. “13년 전 난 지금쯤 카펫을 청소할 필요가 생길 거라는 걸 깨달았고, 제일 싸고 쉬운 방법이 애를 낳는 거라는 생각을 했던 거야. 자 이제 청소를 시작하렴.”
“진짜 엄마가 아니었다면 이건 불법이었을텐데.”
너는 부글부글 끓는 듯한 표정으로 전기줄을 끌어내서 벽의 콘센트에 꽂으면서 이렇게 말해.
서사 B의 내용자체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하다. 하지만 문장의 시제는 미래형이다. 즉, 일종의 예언과 같은 것이다. 미래에 대한 예언 혹은 신탁은 이야기의 개연성을 상당히 떨어트리는 소재이다. 왜냐하면 예언이나 신탁은 ‘왜?’ 혹은 ‘어떻게?’라는 질문에 ‘그냥 그런거야.’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다르다. 이 미래예측적 서사 B의 개연성은 서사A를 통해 알 수 있게 된다.
헵타포드라고 소개된 외계인은 일곱 개의 가지가 맞닿는 곳에 올려놓은 통처럼 생겼다. 루이즈는 이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언어를 분석하게 된다. 이때 루이즈가 취하는 행동은 언어학자들이 소수민족의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음성을 녹음해 음향패턴을 분석하고, 특정한 동작이나 사물을 보여주고 그들의 문자와 음성을 피드백 받아 다시 분석한다. 이 분석 작업 도중에 루이즈는 헵타포드의 문자가 매우 기이한 형태임을 알게 되었다. 표의문자表意文字나 표음문자表音文字가 아니라 일종의 어의문자(語義文字, semagram)(주4)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 문자에는 어떤 문장이나 구句도 없다. 즉 비음운적 문자이다. 문자 하나가 완결된 의미를 지니는데 획의 곡률이나 두께, 혹은 굽이치는 정도에 변화를 줌으로써 그 의미가 달라진다. 하지만 이것은 문자를 쓰기 전에 모든 내용을 ‘동시에’ 알고 있어야한다. 바로 여기서 이 소설의 가장 큰 ‘경이감’을 선사하면서 동시에 서사B의 개연성을 부여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물리학의 원리에 ‘변분變分의 원리原理’라는 것이 있다. 이른바 최단거리의 이론(혹은 페르마의 원리)인데, 이것은 2차원적인 기하학부터 시작하여 광학에까지 적용되는 원리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A지점에서 B지점으로 빛을 보낸다면 당연히 직선의 형태로 갈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평면적인 생각이다. 중력, 혹은 굴절율등이 포함되면 빛이 A에서 B지점으로 가는 최단거리는 달라지고 따라서 이것은 ‘굴절’되어 보인다. 그래서 물리철학에서는 통상의 공식이 인과적인데 반하여, 변분원리는 합목적적이고 거의 목적론적이기까지 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는 소리내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말했다. “그럼 이 광선의 목표는 가장 빠른 경로를 택하는 것이라고 해. 광선은 어떻게 그런 일을 하는 거지?”
“흐음, 의인화해서 확대해석해도 무방하다면, 빛은 일단 선택 가능한 경로들을 검토하고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일일이 계산해야 해.” 게리는 마지막 군만두를 접시에서 집어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그의 말을 이어받았다. “광선은 자신의 정확한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아야 해. 목적지가 다르다면 가장 빠른 경로도 바뀔 테니까.” 게리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목적지가 없다면 ‘가장 빠른 경로’라는 개념은 무의미해지니까 말야. 또 해당 경로를 가로지르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그 경로 중간에 무엇이 가로 놓여 있는지, 이를테면 수면이 어디 이는지 하는 식의 정보도 필요해.”
나는 냅킨에 그려진 그림을 계속 응시했다.
“그리고 광선은 그런 것들을 사전에 모두 알고 있어야 해. 움직이기 시작하기 전에 말야. 맞지?”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빛은 적당한 지점을 향해 출발한 다음 나중에 진로를 수정할 수는 없어. 왜냐하면 그런 행위에서 야기된 경로는 가장 빠른 경로가 아니기 때문이지. 따라서 빛은 처음부터 모든 계산을 끝마쳐야 해.”
나는 속으로 곱씹었다. 광선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를 선택하기도 전에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결정해야 한다.
헵타포드의 문자체계는 비순차적非順次的이고 비음운적이다. 따라서 그들의 사고방식 역시 시간의 순서에 따라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광선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를 선택하기 전에 최종목적지를 결정한 것처럼 동시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조주의 학파의 주장에 의하면 언어는 사고를 규정한다. 그렇다면 항상 순차적인 사고방식을 기반으로 한 언어체계를 가진 인간이 비순차적인 사고방식을 기반으로 한 언어체계를 습득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물론 이 부분에 있어서 핍진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SF의 이러한 핍진성의 고의적인 포기-장르의 특성상 필연적일 수 밖에 없는-는 이론물리학에서의 사고실험과 유사하다. 실제로 3대 그랜드마스터 중에 한 사람인 아서 C. 클라크의 경우, 정지위성과 위성통신의 개념을 자신의 소설에서 다룬바 있으며 이것을 보고 영감을 얻은 과학자들이 정지위성의 궤도에 클라크 궤도Clarke Orbit라는 이름을 헌정한 것은 유명한 일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루이즈는 헵타포드의 언어체계를 습득하면서 그녀 자신의 사고방식도 과거-현재-미래의 순차적인 사고방식이 아닌 현재와 미래를 공존하는 사고체계를 습득하게 된다. 조야하게 말하면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이로서 서사B는 개연성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미래를 알 수 있게 된 루이즈는 어떻게 할까? 이것이 이른바 B급 소설이라면 그녀는 이러한 능력을 갖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악당들을 물리치는데 이용한다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쓰거나 할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서사 B의 내용 중에는 루이즈가 게리와 결혼하여 낳은 딸이 스물다섯에 국립공원 절벽에서 실족사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서사 B를 말하는 시점은 아직 루이즈가 게리와 결혼하기도 전의 시점이다. 그렇다면 루이즈는 어차피 10년쯤 뒤에 이혼할 것이라는 것을 ‘아는 상태’로 게리와 결혼을 하고 스물 다섯 살에 사망할 것이라는 것을 ‘아는’ 딸을 낳으려 할까? 그것은 서사A와 서사B가 하나로 합쳐지는 결말이 말해준다. 그리고 독자는 경이감을 느끼며 무릎을 치게 된다.
“아이를 가지고 싶어?” 그러면 나는 미소 짓고 “응”이라고 대답하지. 나는 허리에 두른 그의 팔을 떼어 내고, 우리는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가. 사랑을 나누고, 너를 가지기 위해.
4. 마치며
좋은 소설이란 무엇인가? 혹은 좋은 서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는 여러 가지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질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을 집필하고 나서, 아니 그 이전부터 창작자들에게 계속 되뇌어졌던 질문일 것이다. 추상적이지만 근원적인 부분에 있어서 서사, 아니 예술의 가장 커다란 의의는 -마르쿠제의 표현을 빌리자면- 위대한 거절이요, 억압된 자들의 귀환이다. 무엇을 거절하고 무엇으로부터 억압된 것인가? 바로 ‘거짓된 욕구’이다. 거짓된 욕구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영화 <트래인스포팅>에서 이완 맥그리거가 “인생을 선택하라. 직업을 선택하라. 가족을 선택하라. 대형TV도 선택하라, 세탁기도 차도 선택하고 CD플레이어랑 자동병따개도. 건강을 선택하라. ……결국엔 늙고 병들걸 선택하라. 자신을 그렇게 만든 이기적이고 재수 없는 놈들에게 조소를 퍼부어라. 초라한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라. 미래를 선택하라, 인생을 선택하라.”라고 읖조린 것은 바로 이러한 거짓된 욕구에 대한 20대 청년의 직관적인 거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짓된 욕구를 자신의 진정한 욕구로 착각한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가? 바로 이 눈과 귀, 그리고 머릿속에 암막처럼 드리워진 거짓된 욕구를 들춰내는 것이다.
그러나 꼭 그것만이 예술, 서사, 소설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소설에서 문체의 유려함과 세밀한 묘사에서 느낄 수 있는 미학, 영화에서 음향과 카메라워크의 조합으로 보여줄 수 있는 미학과 같은 것도 엄연히 존재한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소설 <설국>은 거짓된 욕망을 고발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만 눈에 잡힐 듯이 펼쳐지는 풍경에 대한 묘사는 소설이 표현할 수 있는 미학의 어떤 극점을 보여준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거기에 다른 어떤 서사갈래보다 소설만의 강점이라 생각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상상력의 자극 혹은 지적자극’이 그것이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인간의 사고는 언어에 기반한다. 따라서 눈에 당장 보이는 영상서사의 경우에는 오히려 상상력의 한계를 가지고 온다. 하지만 소설은 다르다. 같은 묘사를 읽어도 독자의 스키마Schema에 따라 떠오르는 모습은 천차만별이다. 또한 그 상상력에 제약은 없으니 그야말로 ‘사고실험’에 가까운 시험을 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SF라는 장르는 첨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이감, 과학적 엄밀성, 그리고 독자를 납득시킬 수 있는 개연성을 갖추고 있다면 SF도 단순한 펄프픽션이 아닌 좋은 소설이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주1: 미국 SF, 판타지 작가협회SFFWA에서 수여하는 SF문학상. 1966년부터 시상하기 시작했으며 휴고상과 함께 2대문학상으로 인정받고 있다. 아마추어들이 투표하는 휴고상과 다르게 작가들이 투표하기 때문에 대중성보다는 실험성이나 작품성이 비중을 두는 경우가 많다.
주2: 1985년 작고한 시어도어 스터젼을 기념하여 제정된 상. 국내에서는 장편 <인간을 넘어서>로 알려져 있는 스터젼은 커트 보거네트가 자신의 작품에 단골로 등장시키는 무명SF작가 킬고어 트라우트의 모델이기도 하다. 17,500단어 이하의 중단편 길이로 쓰여진 영문SF나 환타지 소설을 대상으로 심사하며 매년 7월 미국 캔자스 대학에서 존 켐밸 기념상과 함께 발표한다.
주3: 구조주의 평론가 로버트 숄즈가 ‘어른들을 위한, 섬세하게 묘사되고 구조적으로 일정한 체계를 갖춘 동화’라는 의미에서 풀이한 용어이다.
주4: 어의문자란 그림이나 상징으로 표현되는 문자이다. 작품 내에서는 인간 언어의 문자와 가장 조응하는 문자라고 보고 어의문자라 표현하였다.
gonbn.egloos.com에 원문 작성후, 110711일에 약간의 수정 후 리뷰글로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