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에스프레소 노벨라 Espresso Novella 6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1

며칠 전 친구들과의 술자리가 있었다. 인원이 다수 인지라 이야기가 따로따로 전개되는데, 내 옆에서 한 녀석이 손 지압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고 그 맞은 편의 친구가 그런 류의 이야기는 대부분 과학적 증빙이 안된다며 태클을 걸었다. 그리고 잠깐 다른 그룹의 이야기에 껴서 수다를 떨고 왔는데 어느새 이야기는 생명의 정의에 대해서까지 흘러내려갔다.

대강 짐작은 하겠지만, 처음 이야기를 꺼낸 친구는 생명은 생명 고유의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친구이며 과학적 증빙을 이야기했던 친구는 생명은 결국 고도로 잘 만들어진 컴퓨터라고 생각하는 친구였다.


그 이야기를 옆에서 들으며 문득, 이번에 읽었던 테드 창의 글이 떠올랐다.



#2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를 한줄로 요약하자면 "다마고치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작노트에서도 다마고치를 언급하는 걸로 봐서는 크게 틀리진 않은 이야기일 것이다. 

혹시 다마고치가 뭔지 모르는 세대를 위해서 말하자면 손바닥 보다 작은 기계인데 안에 도트로 이루어진 펫이 있고 유저는 그 펫에게 먹이도 주고 잠도 재우고 씻기기도 하면서 키워나가는 제품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닌텐독스의 조상님쯤 되겠다. 

아무튼 당시에는 적어도 일본과 우리나라에서는 엄청난 센세이션이었고, 반에서 절반 이상은 하나씩 가지고 놀던 그런 물건이었다. 언론에서는 조그만한 액정 속 프로그램에 열광하는 세태에 대해 자기 나름의 분석을 시도했고 늘 그렇듯이 극단적인 분들은 요한묵시록의 666과 악마들을 끄집어 내곤 하였다. 하지만 대지가 갈라지고 하늘이 열리고 일곱 천사가 나팔을 불며 다마고치에 빠진 악인들을 심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대부분의 유행이 그렇듯 다마고치는 자연스레 사람들의 관심에서 잊혀져 서랍 한 구석에서 먼지가 쌓이며 그렇게 사라져갔다.



#3

사실 인공지능의 양육이나 그것들과의 감정교류, 그들의 권리(인권? 프로그램권?)에 대한 이야기 등은 너무나도 많은 작품들에서 다양하게 변주되어 왔다. 사실 진부한 소재라는 평을 들어도 할말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너무 진부해서 요즘에는 잘 시도하지 않는 소재이기도 하다.


좀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내가 테드 창을 좋아하는 이유는 작품의 대부분에서 인간 혹은 생명에 대한 따스한 시각이 녹아있다는 것이다. 이 주제 자체도 얼마든지 과격하게, 폭력적으로, 혹은 섹슈얼리즘 하게 변주할 수 있다. 그러나 테드 창은 이번에도 자신의 장점을 살렸다. 담담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4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혹은 아이디어가 세 가지라고 보았다. 그 중 첫번째가 바로 감정의 교류이다.


아리스토텔리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이제 식상할 정도로 유명하다(실제로는 '폴리스적 동물'이라고 말했지만, 여기선 넘어가자) 그 말대로 인간은 상호교류를 통해 발달한다. 독자獨者로서 온전한 이는 없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이고 이영도가 말한 악마 오스발정도 일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에 감정을 교류하길 원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디지털 펫이 그 대상이다. 한가지 선을 그어야 할 것은 테드 창 본인도 말했듯이 클래식자동차나 귀중한 물건에 애정을 쏟는 것과는 다른 행위라는 것이다. 감정의 '교류'와 '투사'의 차이이다.

그리고 테드 창은 교류가 꼭 영원하지만은 않다는 점을 잊지 않고 있다. 하물며 그것이 가상세계의 비실재적 프로그램이라면 더더욱. 


둘째는 창작 노트를 읽고 나서야 무릎을 쳤던 부분인데, 바로 세계의 인지에 대한 아이디어이다. 이래저래 주저리 말하면 스포일러가 듬뿍 묻어날 것 같으니 딱 한마디만 하면 '지름길은 없다' 라는 것이 테드 창의 생각이다. 


마지막은 바로 SF작가들의 아니 사색을 즐기는 이들의 영원한 숙제인 '생명'에 관한 아이디어이다. 이것은 두 가지로 변주되는데 하나는 과연 이 디지펫들을 '생명'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과 제목처럼 이들의 생애주기(탄생-성장-죽음)으로 나뉜다. 후자의 경우에는 읽으면서 아서 클라크 경의 <유년기의 끝>을 떠올리게 했다.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은 늘 가슴을 떨리게 한다. 그 떨림에는 안주를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 등의 감정이 복잡하게 섞여있다. 



#5

내가 테드 창의 작품 중에서 두 손가락에 꼽는 작품은 <네 인생의 이야기>와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이다. 전자는 두 가지 서사를 절묘하게 섞어놓은 상태에 언어학과 변분원리의 외삽이라는 토핑을 환상적으로 처리했기 때문이고, 후자는 '시간여행'이라는 주제-이제는 SF 101의 두 번째 시간때 쯤 배울 듯한-를 가지고 너무나도 따뜻하게 이야기를 풀어냈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는 두 작품에서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쪽에 가깝다. 따라서 좀 더 하드SF를 기대했던 사람이라면 약간은 실망할 수도 있을 법 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의 글에 심취했고 만족한다.

부디 오래오래 건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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