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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 위의 불길 1 - 휴고상 수상작 ㅣ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18
버너 빈지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최근 SF팬덤 쪽에서 추천평이 솔솔 나오고 있는 책이 있었다. 혹자는 '2011년 한국에 출간되는 SF중 최고일 것'이라는 과감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장르문학이 그렇지만 SF는 특히 그 범주가 넓은 편이고, 팬덤내에서도 취향이 워낙 갈리는게 흔한 게 이 바닥인터라-개인적으로 나는 로저 젤라즈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 친구놈은 젤라즈니의 광팬이다- 추천평만으로는 쉽게 책을 사지 않는데 이구동성으로 이 책의 재미짐을 강조하다보니 시험공부하는 동안에는 소설을 보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깨고 책을 구매할 수 밖에 없었다.
저녁 식사 후 졸린김에 잠깐 떠들러나 보자하고 손에 잡은 책은 오공본드로 붙였는지 떨어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네 시간을 넘겨서 마지막 용어사전 페이지까지 다 넘기고 나서야 손에서 놓을 수 있었다.
책의 상세한 내용은 읽는 재미를 위해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이 책을 구매할까 말까 망설이는 SF독자분들을 위해 몇 가지만 썰을 풀어보겠다.
SF에 발을 디딘 많은 사람들은 세계관의 설정이 가져다주는 경이감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마치 행성의 품안으로 뛰어드는 소행성처럼 말이다. 그러나 역사가 나름 깊어지다보니 옛날에는 혁신적이었던 설정도 흔한 클리쉐가 되는 경우도 왕왕 있었고, 그래서 굳이 설정을 짜놓고 어딘가의 표절 이야기를 듣느니 애초에 설정은 가외로 치부하는 경우도 꽤 있어 보인다.
참신함의 의미에서는 <심연위의 불길>의 설정도 원양어선 속의 냉동참치 정도급은 아니더라도 자갈치 시장의 자갈치 정도의 신선도 정도 수준이다. 어디선가는 봤고, 어디선가는 생각해봤던 것들이다. 다. 다개체지능종족은 D&D의 설정을 떠올리게 했으며, 물리법칙이 달라지는 세계라는 것은 도로가의 버스 정류장만큼 흔하지는 않아도 어디선가 본듯한 느낌은 지울수가 없기 때문이다.
허나 같은 재료로 요리했다해서 같은 수준의 요리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신선한 활어라고 해도 내가 횟칼을 휘두르면 그건 어지간히 배가 고프지 않는 이상 입에 대기 두려운 어육덩어리가 될 것이다. 반면에 약간은 신선도가 떨어지는 물고기라도 일류 요리사가 칼을 휘두르면 보기도 좋고 먹기도 좋은 요리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 버너 빈즈는 어디선가는 봤을 법한 설정들을 어디서도 보지 못한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일류 요리사임이 틀림없다.
거기다 하드SF의 경우 설정의 매혹보다 글의 딱딱함이 독자들을 질리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그렉 이건의 <쿼런틴>의 경우는 그야말로 킹크랩같은 존재다. 맛은 있는데 아무 생각없이 덤비다가는 이가 상할 수 있으니까-이건 하드 스페이스 오페라다!
소리없는 아우성과 같은 이 모순된 조합이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은 몰랐다. 물론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해서 <은하영웅전설>의 대 전투를 상상하면 실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페이스 오페라가 꼭 대규모 함대전이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읽는 이를 두근 거리게 할 수 있는 긴박감이 있으면 된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할텐데 작가는 현실 정치의 의태라는 또 하나의 재미를 던져준다. '박피사'와 '강철경'이 보여주는 모습은 2차 세계대전의 양 대 콧수염을 떠올리게 한다. 고도의 정치적 사상을 그대로 풀어내어 독자들을 질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보다는 문명의 수준이 떨어지는 곳에서의 상징적인 의미로 보여주니 독자들은 이야기의 끝을 다 아는 어른의 심정으로 글을 볼 수 있다. 마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옥희'의 천진난만한 시점이 독자에게 웃음을 유발하는 것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물론 그들이 웃음을 유발하는건 아니다-
이상과 같은 재미짐을 전주 비빔밥 처럼 아주 잘 버무려낸 소설이 <심연위의 불길>이다. 지금도 잇다른 호평을 의심스러워 하면서 구매하길 우려하는 독자분은 그냥 속는 셈 치고 구매해보시라. 두 사람이 나늬라고 하면 나늬가 맞는 거고, 세 사람이 호랑이라고 하면 호랑이가 생긴다고 했다. 이거 팔린다고 내 주머니에 넥슨 캐쉬 10원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한게임 고스톱 머니 100만원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좋은 작품을 공유하고 싶은게 우리네 팬심 아니겠는가? 자 망설이지 말고 롸잇 나우!
뱀발 : 개인적으론 원작에서 Power를 신선으로 번역한 것에는 여전히 약간의 의아함을 감출수가 없다. 우화등선하여 초월체가 되었기에 신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전후좌우가 맞는 말이지만, 신선이라고 하는 단어에서 바로 연상되는 이미지를 너무 간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소설에서는 육체의 제약을 벗어난, 탈각한 정신체인데 내 머리속에서는 자꾸 배추도사 무도사의 이미지나 중국8신선의 이미지가 떠오르니 그 괴리감을 극복하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일단 인간남자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하지만 사실 머리를 굴려봐도 딱히 좋은 대체 단어는 떠오르지 않는다. 역자이신 김상훈님도 많은 고민 끝에 고른 단어라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