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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름 ㅣ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1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20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하얀 공간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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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에 새로운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치명적 상처는 피해자의 목 부위, 절개 부위가 작은 타원 두 개가 겹친 모양이다. 마치 물린 자국처럼. 그리고 피해자의 혈액이 부족하다. 누군가 피를 마셨다는 것이다. 뱀파이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듯이. 카트리네 일행이 사건 진척에 난항을 겪고 있을 때 해리는 형사 자리에서 물러나 경찰학교에서 수업을 하며 행복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랑하는 그의 부인 라켈과 암묵적으로 형사 사건에 대해선 말하지 않으면서 사랑을 확인하고 행복의 맛을 느끼는 중이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단어를 처음 인식하게 된 해리는 차라리 나중에 올 불행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 미리 불행으로 빠져들어가고 싶어한다. 그의 마음을 엿보기라도 한 듯 경찰청장 미카엘 벨만은 그에게 반 강제적으로 이번 살인 사건의 수사를 의뢰한다.
살인자의 부름에 응답한 해리는 사건을 조사하던 도중 아내 라켈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수사를 그만두려 한다. 하지만 의사가 아닌 그가 라켈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코마상태에 빠져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그녀의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 뿐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나서고 다시 사건 현장으로 돌아와 사건을 해결하려 힘쓴다. 결국 범인을 잡아내고 평화가 다시 찾아온 듯했다. 분명히 범인을 잡았다. 그런데 왜... 뭔가 속고 있는 듯 한 이 기분은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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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국가 이름를 제외하고 아무 것도 몰랐던 그냥 유럽 대륙의 많은 나라 중 하나. 그러나 나는 요 네스뵈를 안 이후로 노르웨이의 오슬로를 절대 잊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해리 홀레 형사 시리즈는 이번에 출간한 목마름까지 총 11권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시리즈 물이다. 이야기가 워낙 탄탄해서 많은 팬층을 유지하고 있는 작품인데 나름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를 즐겨 읽는다고 말하고 다니던 나는 부끄럽게도 이번 목마름을 처음으로 해리 홀레 형사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앞의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책을 읽는데 지장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책 시작하기 전에 그 전 각 시리즈별로 간단한 줄거리와 등장인물 소개가 나와 있어서 책을 이해하는데 크게 어렵지 않았다. 다만 1권부터 봐온 독자들이 이번 책을 읽었을 때 더 흥미로웠을 거란 생각에 조금 아쉽긴 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의 사건 개요보다는 해리 홀레라는 인물에 포커스를 맞춰 글을 쓸 예정이다.
이 시리즈의 주인공 형사 해리 홀레는 행복과 정 반대의 위치에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본인 스스로를 그러한 환경에 빠뜨렸으며 그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술에 의존하던 인물이었다. 그랬던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과 행복을 그리기 위해 그들의 삶에 불안을 조장하는 형사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 하지만 해리에게 행복은 일시적인 것이었고 차라리 이 행복이 언제 깨질까 불안해하며 살기보다 불행에 스스로 뛰어드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비유를 얇은 살얼음판을 계속 걸어가는 느낌이라고 비유했는데 마치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다는 약한 희망이 고문이라는 이름을 숨기고 있는 듯 보였다.
결국 해리 홀레는 다시 자신이 머물렀던 곳으로 돌아갔다. 아내가 코마상태에 빠져 침대에 누워있을 때 그는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할아버지는 아픈 할머니를 보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책망하기보다는 당장 나가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미친 듯이 했다. 그리고 해리도 할아버지와 같은 행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 부분은 자칫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아픈 와중에 일에 빠져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냉혹한 시선을 단번에 이해시키는 소름 돋는 비유였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에는 맥거핀 요소가 꽤 있었다. 물론 나의 추리력이 그다지 높지 않은 탓도 있지만 온갖 사람들이 다 수상해 보였다. 왜 저 사람은 이런 행동을 했지? 왜 작가는 이 부분을 굳이 넣었지? 책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수 십 번씩 범인 추리가 바뀌었다. 결정적으로 이야기가 꽤 진전되었을 때 발렌틴의 대사를 읽은 이후로 계속 혼란스러웠다. “넌 나랑 같아. 그래서 너도 속는 거야. 너랑 나, 우린 우리가 똑똑한 줄 알지만 우린 결국 다 속는 거야, 해리.” 마치 작가가 독자들에게 하는 말인 양 더 의심스럽고 무엇에 속고 있는지 답답하게 느껴졌다.
발렌틴은 또 해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넌 내가 되기를 꿈꾸었어. 넌 뱀파이어가 될 차례를 기다린 거야. 넌 목마름을 알아. 그러니까 그냥 인정해, 해리. 언젠가는 너도 피를 마시게 될 테니.” 예언 같은 그의 말대로 마침내 해리가 피를 마시게 되었을 때, 그 상세한 묘사는 내 목을 텁텁하게 만들어서 목마름을 느끼게 했다. 책을 읽다 말고 찝찝한 기분을 씻어내리기 위해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이렇게 단서 하나하나 다 의미있고 그냥 지나쳤던 것조차 모두 의미가 부여되는, 앞 뒤가 퍼즐처럼 시원하게 맞는 거 같은 형사 범죄물을 오랜만에 읽어본 거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이 책의 감상문을 쓰기에 나는 형사 해리 시리즈 중 10권의 부재가 너무 컸고 모든 인물을 이해하기에는 껄끄러움이 있었다. 그래서 꼭 해리 홀레 형사 시리즈를 1편부터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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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지금 하시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제 일을 싫어합니다.” 스테펜스가 미소를 지었다.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거였다면 피아니스트가 되었을 겁니다.”
“피아노를 잘 치시나 봐요?”
“그게 저주 아니겠어요? 사랑하는 일을 잘하지 못하고, 싫어하는 일을 잘하는 거요.”
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주가 맞네요. 우린 우리가 쓸모를 발휘하는 일을 할 뿐이죠.”
“게다가 소명을 따르는 자에게 보상이 주어진다는 건 거짓이에요.”
“때로는 일 그 자체가 충분한 보상이 되기도 하죠.”
“그건 음악을 사랑하는 피아니스트나 피를 사랑하는 사형집행인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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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름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