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의 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2
하야미 가즈마사 지음, 박승후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날 아침, 계절이 움직였음을 실감했다.

.

 벚꽃이 피기 시작할 무렵, JR 요코하마 선 나카야마 역 부근의 연립주택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이 화재는 세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노우에 미카씨와 그녀의 쌍둥이 딸들인 아야네 양과 하스네 양. 용의자는 다나카 유키노로 목숨을 잃은 세 명의 집안 가장인 게이스케의 전 여자친구였다. 한 가정을 무참히 박살시킨 유키노의 범행에 사람들은 분개했고 그녀 또한 순순히 자백했다. 판결은 내려졌다. 피고인은 책임감을 갖추지 못한 열일곱 살 어머니 밑에서, 양부의 거친 폭력에 시달렸으며, 중학교 시절에는 강도치사 사건을, 죄 없는 과거의 교제 상대를, 계획성 짙은 살의를 봤을 때, 반성하는 기색이 거의 보이지 않고, 증거의 신뢰성은 지극히 높으며, 주문, 피고인을 ‘사형’에 처한다. 마지막 재판장에서 태어나서 잘못했다는 말을 남긴 채 그녀는 재판 방청석의 어딘가를 응시하며 미소를 짓고는 그 자리를 떠난다.

 하지만 그녀를 잠시라도 만나본 사람이라면 안다. 그녀가 절대 판결 이유에 나온 말들처럼 살지 않았다는 것을. 그저 그녀가 신뢰하고 싶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함이었을 것임을. 자극적인 걸 좋아하는 매스컴은 그녀를 잔인하고 매정한 살인자로 만들고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미 너무 늦어버린 후에야 활동을 시작한다. 과연 그녀는 왜 이렇게 잔인한 일을 벌였으며 반성하는 기미조차 없이 사형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걸까? 아니, 그녀가 이 화재를 일으킨 방화범은 맞는 것일까?

.

 읽는 내내 불편했던 작품이었다. 이 작품이 재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유키노의 인생이 불편했다. 결과적으로 유키노는 벌을 받을 만큼 잘못한 것이 없었지만 사회의 냉담한 반응을 자아낼 수 있는 일은 모두 겪었다. 엄마 쪽 유전으로 흥분하면 의식을 잃어버리는 병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먼 미래는 함부로 상상하지 않는다. 희망을 품고 있으면 죽음이 두려워지는 게 두려워서 그랬을까. 아직 어린 나이에 이미 철이 들어 체념하는 듯한 어린 유키노의 말은 오히려 더 미래를 그려보고 싶다는 말로 들렸다.

 사랑하는 엄마가 죽고 외할머니 손에 자라면서 그녀는 점점 더 작아지고 따뜻함에서 멀어진다. (이는 그녀가 차가워진다는 게 아니라 그녀가 느끼는 따뜻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키노가 그녀의 삶을 완전히 포기하려 한 건 아니다.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준 중학교 친구 리코에게 마음을 열었고 자신을 필요로 해준 게이스케를 사랑했다. 하지만 더 좋아질 거라는 기대의 대가는 잔인했다. 그래서 마지막 사형선고를 받고 유키노를 살리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거부한다. 아마 다시 함부로 미래를 상상한 이후 역시나 배신당했을 때에는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런 선택을 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신이치 역시 만만치 않은 삶을 살아왔다. 사립 중학교에 떨어지고 어머니에게 한심하다는 말을 들은 후 참을 수 없는 화를 억누르지 못해 폭력을 행사한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은 것을 학교에서 다녀오면 그대로 어머니에게 풀었다. 학교에서의 괴롭힘 때문에 서점에서 돈을 훔치던 그는 그의 죄를 유키노에게 뒤집어 씌웠다.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 거지만 그 이후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는 씌웠다고 생각했다.) 물론 크면서 충분히 반성하고 유키노를 구하려고 하지만 나로서는 그의 죄가 면죄될 순 없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유키노가 신이치와 쇼의 도움을 거부하고 죽임을 당하기로 한 결정을 내렸을 때 그녀의 마음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이미 숱한 배신과 상처를 받아와서 너덜너덜해진 그녀가 이번 구원의 손을 잡고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까? 

 이 책의 처음과 마지막은 우리가 얼마나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쉽게 판단하고 있는지에 대해 자각시켜준다. 방화 살인을 일으킨 유키노는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생겼네.’라고 묘사된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그녀는 전혀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중반에는 ‘어떻게 이런 여린 그녀가 그런 잔인한 살인을 저지를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다가 후반부에서는 그녀가 절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하게 된다. 하지만 나조차도 초반 그녀에 대한 묘사를 읽으면서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나도 똑같은 뉴스를 보고 들었다면 그 여느 사람들과 같이 그녀의 잔인성에 혀를 내두르고 그녀를 질타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들리는 그대로를 믿으려한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면서도 이야기 초반, 나는 함부로 다나카 유키노의 정의를 끝마쳤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너무 극단적으로 몰아넣은 전개라서 과연 실제로 있을 수 있을 얘기일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극단적인 전개가 이 글의 주제를 더 잘 드러내주는 거 같아서 재미있게 읽었다. 다만 지금 감상문을 쓰면서 문득 궁금해진 점은 유키노가 어떻게 ‘비밀의 폭로(피의자가 진범만 알 수 있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를 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것이다.

.

 늘 죽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어릴 적에도, 중학교 시절에도, 성인이 된 뒤에도, 지금에 이르기까지. 무언가에 절망하려 할 때마다 자신을 살려주려는 누군가가 반드시 눈앞에 나타났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만은 용서 못 해.”

 강한 어조로 그렇게 말해준 이는 누구였던가.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중요한 선택지를 빼앗기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발끈하던 기억이 난다.

 차라리 누군가에게 심판받는다면 분명 순순히 받아들일 것이다. “사형당하고 싶었다”라는 흉악범의 농담 같은 말도 마냥 웃어넘길 수는 없었다.

.

 2010년 가을에 요코하마 지방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뒤로는 죄를 뉘우쳤으며, 구치소에서는 조용히 그때를 기다렸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