킨 (리커버 에디션) 옥타비아 버틀러 리커버 컬렉션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20년 7월
평점 :
품절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여행에서 팔 하나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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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나의 스물여섯 번째 생일에 다나는 그녀의 남편 케빈과 함께 막 이사한 집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갑자기 엄청난 현기증이 몰려왔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는 외딴 곳에 있었다. 숲 가장자리, 녹지였다. 그녀의 눈 앞에는 잔잔한 강이 흘렀고 그 가운데 어린아이 한명이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다나는 그 어린아이를 구했지만 뒤늦게 나타난 아이의 부모가 그녀에게 총을 겨눴고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원래의 집으로 돌아왔다. 숲 속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케빈에게는 다나가 사라졌다가 나타난 지 3초밖에 지나지 않았었다. 또 같은 현기증을 느끼고 정신을 차리자 그녀는 그녀가 그 때 구해줬던 그 남자아이의 집에 있었다. 남자아이의 이름은 루퍼스. 알고보니 자신의 조상이었고 1972년을 살고 있던 그녀가 현기증을 느낄 때마다 오게 된 곳은 1815년, 노예제가 폐지되지 않았을 때였다. 루퍼스가 죽을 위험에 처할 때마다 그녀는 루퍼스를 구하기 위해 1815년으로 불려갔고 그 곳에서 그녀가 죽을 위험에 처할 때마다 현재, 1972년으로 돌아왔다. 세 번째 어지러움을 느끼게 됐을 때 남편인 케빈이 그녀를 안았고 이번에는 그와 함께 과거로 오게 됐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그 시대에서 죽을 위기에 처해있을 때 케빈과 같이 있지 않았고 눈을 떠 다시 돌아온 집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케빈은 돌아오지 못했다. 이래서 케빈과 함께 가면 안 됐던 건데. 그런데 왜 다시 현기증이 나지 않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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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덮자마자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추천하고 싶은 책이 생겼어.” 책이 꽤 두꺼웠는데 어느 틈에 다 읽었을까. 타임루프라는 꽤 익숙한 소재인 SF 소설이었다. 이번에 리커버 에디션으로 책이 새로 출간됐는데 마치 다나가 느끼는 그 현기증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 같은 표지도 너무 마음에 들었다. 시간여행을 하는 주인공은 흑인 여성이었고 하필 그녀의 여행지는 아직 노예제가 폐지되지 않은, 흑인의 인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역시 극한의 상황이 주는 긴박감은 스토리를 더 흥미롭게 만들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여행을 하게 될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황은 읽는 사람들도 긴장하게 만들었다. 나도 읽는 내내 ‘이 때 돌아가야 하는데! 아, 벌써 과거로 가면 안 되는데!’ 속으로 같이 주인공과 감정을 공유하며 여행을 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에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만약 내가 백오십년 전, 아직 신분제가 폐지 되지 않았을 조선 땅에 낮은 신분으로 그 시대를 살아가야 했다면 현실을 부정하다가 결국엔 순응해버리고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고 현재로 돌아오지 못한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잘못된 것이 옳은 일이라고 여겨지는 곳에서 다나는 적당히 비위를 맞추며, 하지만 불합리함에 가슴 답답해하고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도와주며 그 시대를 살아냈다. 물론 자유를 찾아 떠난 사람들의 결과들은 참혹했지만 현재를 살고 있는 다나는 멈출 수 없었다. 

 점점 읽을수록 루퍼스를 동정하는 나를 발견 할 수 있었다. 너무 다나에 이입해서 그런가. 다나가 말하는 루퍼스와 다나와의 관계성이 이해 안 가면서도 묘하게 설득됐기 때문에 마지막에 루퍼스가 정신적으로 많이 흔들릴 때는 가여웠다. 다나는 루퍼스가 폭력적으로 사랑을 표현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이 이해(알고 있기에 무작정 루퍼스를 싫어할 수 없는)가 때로는 다나에게 독이 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여행에서 다나의 결정은 그 누구도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여행에서 마지막 여행에서 잃은 팔 하나는 앞으로 평생 다나가 안고 가야할 루퍼스와의 연결고리가 되었다. 

 프롤로그와 이어지는 마지막 부분도 너무 좋았다. 처음 프롤로그를 읽었을 때는 무슨 상황인지 쉽게 파악할 수도 없었는데 여행을 다 마치고 돌아올 때 묘사됐던 딱딱하게 굳어지는 그 느낌이 내 팔에도 저릿하게 느껴졌다.

 내가 이 책이 더 좋았던 이유는 자칫하면 더 어두워질 수 있는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치중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대를 살고 있는 흑인 여성 다나가 약 150년 전으로 돌아가서 노예제 폐지 운동을 했다는 내용이면 나는 책을 조금 딱딱하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연적인 다나와 루퍼스의 관계에 주목해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자연스럽게 그 당시의 사회를 보여줘서 부담감 없이 잘 받아들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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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도 도망갔다가 잡혀 온 검둥이들을 봐야 해. 봐야 알지…… 굶주리고, 반 벌거벗은 몸에 채찍질을 당하고 질질 끌려다니고 개에 물리고…… 너도 봐야 해.”

 “난 반대쪽을 보고 싶은데요.”

 “무슨 반대쪽?”

 “성공한 사람들요. 지금은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

 “있다면 말이지.”

 “있어요.”

 “성공한 사람이 있다고도 하지만, 그건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과 비슷해. 아무도 돌아와서 얘기해주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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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녀석이 죽었으니 이제는 계속 제정신으로 살 가망이 생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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