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로메르 - 은밀한 개인주의자 현대 예술의 거장
앙투안 드 베크.노엘 에르프 지음, 임세은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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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을유문화사에서 제공받은 책으로 쓴 서평입니다.

에릭 로메르의 탄생 100주년인 2021년, 에릭 로메르는 한국에도 이제는 어느 정도 알려진 감독이 되었다. <녹색광선>은 영화광들 사이에서 필청작으로 불리는 영화다. 작년부터 시작해 에릭 로메르의 각본집과 소설집 등이 출간되었고 그 끝에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앙투안 드 베크의 <에릭 로메르-은밀한 개인주의자>가 출간되었다. 이 책의 원서를 사고 몇십 페이지를 겨우 읽은 나로는 이 책의 출간이 더없이 반갑기만 하다. 에릭 로메르를 사랑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의 영화는 다른 누벨바그 감독들에 비해서 누구라도 접근이 가능하다. 한 남자가 두 여자를 두고 고민하다가 원래 애인에게로 돌아간다는 상황을 변주하는 <여섯 개의 도덕 이야기>, 프랑스 사람들이 모두 아는 격언을 바탕으로 하여서 찍은 스크루블 코미디 연작 <희극과 격언>, 그리고 사계절에 따라서 감정의 변화를 찍은 연작 <계절 이야기>가 그의 대표작일 것이다. 그의 영화들은 고다르나 알랭 레네가 그러하듯 영화로 현실에 개입하려기보다는 자신이 어릴 적에 본 할리우드 영화들, 자신이 보고 쓴 고전 소설들에 충실하게 세계를 그린다. 모두가 아는 통속적인 이야기들에서 장르의 특성상 생략된 심리들을 추적하면서 인간의 심리라고 할 것이 얼마나 변화무쌍한지를 추적한다. 그는 이를 히치콕의 딜레마와 스크루블 코미디의 연애담을, 아마추어리즘과 고전적 회화를 뒤섞으면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든다. 인터뷰에서 소설처럼 영화를 찍는다던 그의 영화는 대사들이 깔끔하며, 매 씬이 깔끔하게 잘려나가고 경쾌한 편집 리듬을 지닌다. 우리가 소소한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그의 이야기는 신과 사랑 등 온갖 주제를 넘나들지만 그의 영화가 보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의 미장센은 인물의 심리를 따라가며, 심리에 따라서 의상과 풍경, 인물의 위치 등이 바뀌는 인상파 회화의 영향으로부터 시작한다. 모네의 회화를 보는 느낌으로 그의 영화를 보면 재밌다. 하지만 같은 누벨바그 시대 감독인 장-뤽 고다르라든가, 프랑소와 트뤼포가 개방적인 인물이었던 데 비해, 에릭 로메르는 가정에 충실하고, 고전주의자인 데다가 철학적인 질문을 어떻게 작품으로 써낼까에만 치중한 은밀한 시네아스트다. MBTI는 INFP 정도로 짐작된다. 그리고 그의 스타일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는 이 책 <에릭 로메르 은밀한 개인주의자>에 다 나와있다. 지금껏 쓴 내용도 모두 이 책을 근간으로 한 내용이다. 이 두꺼운 책을 언제 다 읽을까, 감당이나 가능할까 싶었지만 앙투안 드 베크의 필력과 임세은 역자님의 깔끔한 번역은 그러한 두려움을 잊게 만든다. 원서와 비교해보았을 때, 별 흠도 없으며 자연스레 번역되어서 한 편의 소설처럼 읽힌다. 은밀한 개인주의자이던 에릭 로메르가 가닿으려던 영화는 실은 영화의 본질, 세계를 그대로 인상파 회화처럼 스케치해내는 것이었다. 변화무쌍한 세계로부터 벗어나서 인간다움, 자연스러움에 영화로 접근하려는 예술가의 집념이 오롯이 그려진다. 이 책은 모리스 셰레라는 필명을 지닌 작가가 어찌 로메르로 거듭나고, 그가 경험한 두 변화가 어떻게 그를 변하게 만드는가, 라는 두 가지 큰 틀을 지닌다. 인상파의 영향권 아래서 쓴 그의 첫 소설 <엘리자베트의 집>이 어떻게 실패하고, 그가 <까이에 뒤 시네마>에 들어가 영화감독으로 거듭났는가를 따라가는 과정은 흥미롭다. 1948년, 앙리 랑글루아와 앙드레 바쟁을 필두로 등장한 파리 시네마테크와 파리 시네필들 사이에서 일어난 아스트뤽의 "작가 만년필론"(지금의 작가주의의 기원) 논쟁에 끼어든 그는 계속 리뷰를 쓰면서 까이에 뒤 시네마의 필진으로 성장한다. 소설을 쓰던 모리스 셰레는 더는 활동하지 않고 까이에 뒤 시네마가 히치콕을 주요 작가로 선정하고 그를 연구하기 시작한 조류에는 그가 있으며, 그는 누벨바그의 선배로서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동시에 그는 전쟁이 발발할 때에도, 68혁명의 물결이 일 때에도 "마르크스의 열병"을 비판하면서 영화를 자체 제작하고 배급하는 시스템에 치중했다. 이때 그는 자신이 쓴 이야기들을 영화로 찍으려 한다. 소자본과 무급, 자체 배급 등으로 자본의 개입이 온전히 제거된 그의 영화를 앙투안 드 베크는 "영화의 모든 거짓 위엄이 사라지고 순수한 상태에서 존재의 본성(그리고 자연 그 자체)이 피어오른다"라고 본다. 그의 영화의 순수성을 마주하는 과정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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