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전목마에서 만나 - 열네 살의 르네 마그리트를 매혹한 축제의 세계
퍼트리샤 앨머 지음, 주은정 옮김 / 에포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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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유럽일주를 할 무렵, 내가 파리를 떠나서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벨기에 왕립미술관에 위치한 르네 마그리트 미술관이었다. 유럽 일주에서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은 모두 나한테 성지로 여겨도 될 만한 가치를 지녔다고 해도 무방했다. 르네 마그리트 미술관은 어릴 적부터 그곳의 이름만 들으면 설렐 정도니까. 화가인 어머니를 따라서 어린이집 대신에 화실에서 동화책 대신에 영어로 된 르네 마그리트 화집을 보고 자랐다. 중절모를 쓴 남자, 머리가 큰 사람, 하늘에 떠다니는 성, 얼굴에 천을 두르고 키스하는 연인, 화면 속 화면들... 르네 마그리트의 세계는 알수록 미지의 세계에 가까운 것이었고, 그 세계만으로 하루를 보내기가 가능했다. 그건 무성영화에 가까운 그 동적인 세계관 때문이었을 거다. 나를 실제로 본 사람은 알겠지만 내 휴대폰 폰케이스도 <연인들1Les Amants>이다. 글자를 배우기 전 무렵이었으므로 그 그림들의 맥락을 알기는 힘들었다. 왕립미술관에 가기 전에야 그 그림들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르네 마그리트의 세계를 다루는 비평서를 국내에서는 보기가 힘들었다. 시공아트에서 나온 수지 개블릭의 입문서를 제외하고는 마그리트를 다루는 책은 절판되거나 도화집 위주로 출판되는 편이었다. 이 책 <우리, 회전목마에서 만나>는 르네 마그리트를 기존 미술계의 흐름을 반대로 뒤집으면서 르네 마그리트에 대한 명랑한 이해를 돕는다. 이 책은 마그리트의 세계를 대중문화와 디자인, 순수 미술이 공존하는 놀이터로 만든다. 영화와 서커스, 카메라 옵스큐라 등 마그리트가 살던 시기의 다른 장르들이 어떻게 미술로 스며들어와 기법이 되었고, 그것이 마그리트 그림의 모티프가 되었음을 상세히 설명한다. 이 책은 (미래파부터 시작해 1895년 초기 영화의 출연 당시부터) 여러 매체들이 부딪히는 격전장이었던 캔버스의 생동감을 상세히 살려내고, 마그리트 그림에 깃든 활기를 되살리면서 그의 그림을 살아움직이게 만든다. 이 책을 올해의 미술 책이라 말하고픈 이유다. 기존 마그리트를 다루는 책은 어릴 적 그의 어머니가 자살하여서, 얼굴에 천을 두른 채 발견된 경험에만 초점을 맞춘다. 이 책은 그러한 해석이 마그리트를 정신분석학/트라우마에 가두며, 그의 미술을 해석할 폭넓은 가능성을 제거한다고 본다. 또한 르네 마그리트도 앙드레 브르통을 위시로 한 초현실주의를 거부하고, 폴 발레리 등에 매료되었던 벨기에 아방가르드의 일원으로 활동한 점을 근거로 둔다. 작가는 마그리트가 14살 때, 마그리트의 사랑을 처음 만난 회전목마를 중심 이미지로 마그리트의 세계를 차츰 연결해나가는데 이걸 보는 재미가 장난이 아니다. 루이 푀이야드의 연쇄극에 드러나는 미장센(프레임 속 프레임이라는 이중 구도를 처음 드러내면서 연극적 스테이징을 마련한 첫 시네아스트가 루이 푀이야드다.)이 어떻게 마그리트의 그림에 반영되었는가를 살피는 장면이 그야말로 압권이다. 앞서 말했듯 <연인들>도 이 작가는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면서 당시 마그리트가 본 영화와의 유사성을 설명한다. 그제야 <연인들>은 트라우마의 그림이 아니라 영화의 연장선으로 해석되어서 생기를 얻게 된다. 마그리트의 세계관을 이리 획기적으로 이야기하는 책은 지금껏 없어서 새로웠고, 미술이 어찌 매체를 횡단하는가를 연구하고픈 사람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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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뜻밖의 뇌과학 - 뇌가 당신에 관해 말할 수 있는 7과 1/2가지 진실
리사 펠드먼 배럿 지음, 변지영 옮김, 정재승 감수 / 더퀘스트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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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포자인 천생 문돌이이지만, 과학에 흥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서도 뇌과학 분야를 어쩔 수 없이 사랑하고, 그 분야 서적들은 웬만하면 읽는 편이다.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계를 보는 방식을 뚜렷이 밝히는 듯해서다. 현상학이나 정신분석학 이전의 무언가를 공부하는 기분이랄까. 뇌과학 책을 읽을 때마다 내가 한 실수들, 내가 한 선택들과 내가 살아가는 패턴의 기원을 어쩔 수 없이 톺아보게 된다. 이 책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은 지난 몇 년간 읽은 뇌과학 책 중에 최고인 책이다. 첫날에 다 읽고서는 책을 덮는 순간에 설레서 다시 한 번 꺼내 읽었다. 뇌과학 전문 용어라고 할 것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접근성을 높이며, 뇌과학 책들이 내포한 냉정한 반-인간주의 대신에 희망을 주는 책이어서다. 이 책은 이 책의 출발점이자 뿌리라고도 할 수 있는 1/2 파트와 7 파트로 구분되어 있다. 1/2 파트는 뇌는 생각하려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생각하지 말라는 듯한 이야기를 건넨다. 하지만 이 책은 자유의지란 없으니 순종하라는 말 대신에 뇌가 어차피 생각하지 않으니, 뇌의 생리적인 패턴을 바꾸어서 차츰 우리 삶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 어떠하냐는 태도를 견지한다. 이 태도는 그 어떤 철학책보다 감동적인데, 한 예로 우리가 기억하는 방식을 다루는 파트가 있다. 베르그송에서부터 이어진 철학은 기억을 어떤 축적물로 가정하고, 우리 삶을 지속성 아래에 포섭하지만 이 책은 그 전제 자체를 무너뜨리며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한다. 이 파트만으로도 나는 내 안에 억눌린 기억에서 벗어나 결국은 나아지리라는 것을 확증받은 듯하다.

나는 올해의 책이라 생각하고 뇌과학을 처음 접해본 사람, 혹은 뇌과학이 차츰 익숙해지는 독자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엉망진창인 삶에서 어떻게든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얻고픈, 더욱 성숙해지고픈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서평단 #더퀘스트 #뇌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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