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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와인에 빠져들다
로저 스크루턴 지음, 류점석 옮김 / 아우라 / 2011년 7월
평점 :
기차를 타고 스쳐지나가는 포도원에 대한 기억이 아련히 남아있다. 키가 낮은 그 곳에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따스한 태양의 어루만짐이 느껴졌다. 토지 면적이 고만고만한 남부의 농장은 아기자기했던 기억이다. 와인 농장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드넓은 샤또와는 다른 우리만의 향토적인 냄새가 풍긴다. 와인의 원재료,포도송이를 맛볼 때, 지금까진 일차적인 미각의 추구가 전부였다. 오감 중 미각만 미련하게 누렀던 것이 포도 맛보기였다. 와인은 뭐가 다르냐구? 청각은 선택이고 나머지 시각,촉각, 후각 그리고 미각을 아우르는 것이 바로,와인 음미다.
여름 과일로 먹음직스런 포도는 자체로도 비타민이 풍부하다. 한데 레드 와인이 되면,항산화 역할인 노화 억제 기능까지 첨가된다고 들었다. 여기에다 최근에 밝혀진 한 자료에 따르면, 레드 와인에 자외선 차단 효과마저 있다니! 마시는 썬블럭이다. 다소 알콜이 함유되어 주류로도 인식되어지는 와인이 갑자기 확 끌린다. 그런데, 나의 와인 지식의 현주소는? 번지를 알 수 없다. 백화점이나 마트에 멋드러지게 쭉 들어선 와인 진열대를 바라본 소감은 뭐랄까, 아는 게 없다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네임을 단 수십가지의 종류들에 알게 모르게 주눅들었던 것도 같다. 이 책에는 종류별(화이트,레드와인) 국가 대표 와인에서 등급별 와인에 대한 저자의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애정을 담아 그윽하게 표현되고 있다. 철학가인지 문학가인지 정체가 묘연할 정도다. 나도 몰래, 그가 표현하는 개성적인 와인에 하나씩 하나씩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그나저나 그 많은 와인을 맛 보려면 시간 꽤나 걸릴거다. 저렴하지만 양질로 선보이는 와인부터 시작해서, 저자의 추천주는 꼭 놓치지 않고 싶다. 2등급으로 프랑스를 담은 신성한 사또 트로타누아, 사랑과 믿음이 결코 식지 않은 백포도주 퓔리니-몽라쉐, 푸른 빛깔의 백포두주 중 가장 유명한 샤블리 그랑 크뤼,그리고 가장 남성적인 레드와인 에르미타주 등등이 기억에 남는다.
오래된 참나무통에서 숙성했는데도 샤블리는 미네랄 성분이 있어서 냇가의 조약돌처럼 반짝인다. 조개요리나 하얀 소스를 바른 닭요리에 ...밤이 깊어갈 때 가만히 책상에 앉아서 홀짝이는 샤블리에 곁들일 수 있는 환상적인 안주는 또 한잔의 샤블리뿐이다.-101
이 백포도주(퓔리니-몽라쉐)는 내가 트로타누아를 훔쳐마실 때와 같은 계시를 보여주었는데, 잔 속에서 떠오른 한송이 버터 같은 꽃잎이 사과맛 나는 수정빛 열매를 둘러싸고 있었다.나는 이 와인 맛의 오묘함과 명료함을 ...필리니-몽라셰와 비교해 보았을 때 이전에 내가 마셨던 백포도주는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74
와인의 질은 재배하는 토양의 질에 달려있다고 책은 여러번 강조했다. 미네랄이 풍부한 토질 자체가 그 곳에 뿌리내린 포도맛에 밀접한 영향을 끼치고, 이는 와인의 깊은 맛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을 거치며 잘 일구어진 토양의 양분이 특정 지역에서 출하된 와인의 격을 한층 높여 준다는 얘기같았다. 예전에는 와인하면 보르도와 부르고뉴산을 떠올렸는데, 지금은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유럽뿐만 아니라, 중동,남아프리카,호주,미국 캘리포니아까지 두루 재배되고 있어 특유한 맛을 각자 자랑하기 때문이다.와인이 이렇게 널리 보급되어진 것에는 와인 생산지가 문화의 아이콘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은근한 자부심을 내비친다. 갑자기 우리의 실정이 궁금해진다.
청포도,거봉,흑포도 등의 포도빛깔 만큼이나, 섬세한 와인의 빛깔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마구 밀려온다. 다시 되뇌여본다. 와인 음미는 오감에 가깝다고. 코 끝으로 전해지는 찡한 후각의 첫터치에서 그 향기를 느끼고,오묘한 빛깔에 눈이 매료되고 , 와인잔과의 접촉에서 촉감을, 그리고 혀로 전수받는 미각의 협주곡이 신의 물방울 와인인 것이다. 청각만 만족시키면 완벽한 조화다. 좋아하는 음악이라도 곁들여 보자. 오감이 충족되기 시작하는 순간이 되리라.
이 책과의 만남은, 술도 음료수도 아닌, 오감이자 문화인 와인과의 만남이었다. 와인에 대한 관심이 절로 일고,눈여겨 와인을 바라다 볼 수 있게 해 준다. 저자가 가진 애착의 일부분이라도 공유하고프다. 와인 레이블이 잘 보일 수 있는 크기의 컬러사진이 제공되었으면 한결 멋진 책이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