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눈이 일곱개란다. 한 마리는 외눈박이라는 건가. 아니다. 존재하는 고양이는 세 마리뿐. 그럼,나머지 하나의 눈은. 고양이가 상징하는 이면적 악마스런 죽음의 눈, 우리가 두려워하는 '내면의 눈'이 아닐까 하고 책이 후반부로 치달으면서 깨닫게 된다. 한국인이 한국인의 생각을 읽는 것은 동일 문화가 빚어낸 연상적 사물이 너무도 한 방향이기에 나도 몰래 피해오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안의 고정관념, 아니 이 사회의 밀접한 환경이 낳은 고질적인 흡사한 생각의 병에서 발상의 자유를 돋고 싶었던 까닭이었던 듯 싶다. 같으면 공감하고, 다르면 쉽게 저해하는 풍습이 인간의 개성을 얼마나 쉽사리 말살하고 부식시키는지, 재미없는 세상으로 만들어 가는지.몰래 잠식한 스스로의 고정관념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행동은 다르게 실상은 같은 뿌리에서 뻗친 고정관념을 안고서...그것도 점차 강하게...내가 살아온 사고와 행동방식의 한 면. '일곱개의 고양이 눈'은 이런 내 독서풍에서 약간 전환한 케이스. 우리의 작가가 지은 책. 얼마 전에 고양이를 소재로 한 외국 소설을 읽게 되었고 느닷없이 동물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생기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생각대로 일이 풀린다하지만, 우연찮게도 고양이가 제목에 새겨진 이 책을 읽게 된다. 이전의 환경에서 싹 튼 고양이의 이미지는 그랬다. 공포가 우선 머릿속에 그려지는...그 상징적 모습에서 방향 선회를 도운 것이 그' 또 다른 고양이 소설이었다. 근데, 이번에는 다시 원점으로 사고가 복귀한 느낌이랄까. 생각의 저편에서 오는 매력과 같은 선상에서 오는 공감이 시간 간격을 두고 산뜻함으로 또 현실직시로 이중적인 면모를 느끼게 한다. 이 책은 여러 주인공들의 대화 처리보다 독백식의 심리 묘사 위주로 써 내려가고 있다. 내 운명이 지금 이 자리에 놓이게 된 것은 제 3자의 탓이 컸다고 보는 등장 인물들의 나레이터로 처리해 주고 있다. 서로 다른 듯하나 비슷한 '거센 운명의 풍파'를 거친 이들이 서로 엮여 있는 것 같은 소설. 그들이 만족할 수 없는 현재 인생,그것이 불만족스런 이유는 장난같은 운명의 불가항력적 외부요인이 우선 작용했다. 하지만, 결국 더한 나락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은 외부가 아니라 그것에 항복한 주체할 수 없었던 내면의 비관이 더 컸기 때문임을 객관적으로 바라다 보게 한 작품이다. 내가 나를 다스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삶이 향기롭겠는가. 내 생각이 내 육신과 정신을 관장하지 못하기에 빠져드는 함정. 행동이 윤리적 관념에서 이탈하게 되고, 개인의 정신적 안녕조차도 더불어 피폐해져 가게 되는 양상으로 뻗치게 되는 것 같다. 생각과 달리 불운의 여신이 거듭되다 보니, 이성보다는 야성으로 치우치게 되는게 인간이지 않나 싶다. 돌이켜보면, 나만 해도 우습지도 않은 야속한 그 수레바퀴 밑에서 맴돌았던 시기가 많았다. 지나서 생각해 보면, 내가 지나치게 집착했던 것들이 오회려 나를 스스로 괴롭힌 격인데... 내게 너무도 단단했던 쇠사슬의 고리에서 좀 더 일찍 헤어나지 못했던 게 가장 큰 문제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 눈으로 바라본 나에 대해서는 내 양심이 가둔 철저한 무언의 약속 때문인지 도대체 그 문제의 늪에서 헤어나기 힘들었었다. 헌데, 제 삼자의 입장에서 가진 눈, 일곱 번째 눈은 지혜롭게도 이런 모순점을 잘도 간파하고 있지 않나 한다. 일곱번째 눈은 내면의 눈이다. 본능적이기도 하지만, 객관적인 눈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기발한 아이디어가 맘에 든 책이다. 그런 장점에다 환경적 공감대가 불러일으킨 몰입도가 높았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너무 쉽게 형성된 공감대에 색다른 의외성이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도 해 봤다. 적나라하고 식상한 기존 뉴스의 노출방식은 대중적 베스트셀러에 적합할지 모르지만, 창작성 작품에는 마이너스. 독자가 의외로 창작작품에 목말라한다는 사실도 알아주면 좋겠다. 우리 한국 문학의 발전을 바라며 긁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