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옹이, 고양이에 대해 한 번이라도 제대로 관심을 주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그 기억은 어릴 적으로 돌아가게 된다. 밤마다 구슬피 우는 요네들의 아기 울음소리는 마치 애드가 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를 연상케 했었기에, 어린 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었다. 그 가느다란 고음은 칠흑같은 달밤의 정적 속에서 요란하게 울려 퍼졌고, 으스스함에 얼른 이불 속으로 숨어 들었던 기억이 스스럼없는 그들과의 대화를 차단하게 된 결정타였던 게다. 내가 만들지 못한 동물에 대한 정겨움을,그 시절에 만약 부모님께서 조금만 도와주셨더라도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로 인해, 지금의 내 행동에 다른 어떤 변화가 있었을 가능성이 남았을지도 모른다.아쉽게도 그런 작은 호의는 주어지지 못했었다.(어쩐지 원망 하나 없는 것 같다.) 아직 이 '냥이'들과는 동떨어진 삶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그래서인지 어딘가 호기심의 한 자리가 구석에 둥지를 틀고 있어왔던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이 동물과 이야기를 나눈다. 얼핏 보면 이상한 눈으로 보여지기 십상인 부분이나, 가능한 부분이기도 하다. <고양이가 내게 말을 걸었다>라는 책 제목은 이 가능성을 현실화하여 잘 보여준 책이었다. 최고의 낭만이 깃든 그 곳, 프랑스에 실제로 이들을 몹시 사랑한 부부가 있었다. 주거니 받거니 냥냥이를 관찰하면서 겪어온 삶의 시간들을 우리들에게 이야기 한다. 지금은 80세 가량의 노부부가 된 이들이 주욱 함께한 고양이들만 해도 열마리에 달했는데 마지막 한마리를 남기면서 이 책을 집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가. 확실히 고양이들에 대한 새롭고 놀라운 정보들이 넘쳐 났던 것 같다. 생의 마지막 자락에서,지긋이 냥이를 바라다 볼 수 있는 지혜로운 시선은 사람을 관찰하는 듯하며, 그 무한한 포용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던 작품이었다. 내가 고양이를 한 번도 가까이 둔 적이 없음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그들에게 무지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고, 나와 상반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당연한 사실조차 얼마나 새삼스럽게 여겨질지를 가늠케 하는 잣대가 될 것으로 본다. 부부는 드넓은 자상함의 그릇으로 고양이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했다. 그저 문을 열어 두는 것으로 길 잃은 고양이들과의 만남을 인연으로 이어나간다. 열 마리 고양이들을 열 명의 자녀들을 돌보는 애정으로 키우면서 겪는 기쁨과 슬픔을 나누어 주었다. 히야~, 내가 지금 야옹이들을 보고 있는 건지, 제각기 개성있는 인간들을 보고 있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서로에게 열정적인 대화를 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엄마 아빠인 부부와도 무언의 대화를 자주 교류하기도 한다. 이런 것일까. 다른 생명체와의 기나긴 시간속에서 저절로 사랑이 싹트고, 말하지 않아도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하나의 언어로 이해하게 되는 것일까. 언제일지 내가 이들 부부를 닮아가는 날이 올 것 같은 들뜬 상상을 해 보게 한 즐겁고 유익한 작품이었다. 고양이에 대한 상식이 백지장인 독자라면, 무척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소설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 여유미가 유유자적하게 흐른 은은한 음악과도 같은 소설이다. 내일부터는 길거리를 스쳐지나가는 얘네들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 같다. 눈길을 보내고 씨익~ 무언의 대화를 건네주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