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 지성의 이야기
정아은 지음 / 문예출판사 / 2021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 띠지에 있는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지성의 입장에서 지성의 감정을 따라 읽다가 종종 잘도 살아남았네 싶은 순간이 있었다.
첫 장부터 지성의 혼란함을 따라 전개되는 이야기를 소화하다 보면 대체 어떤 전개가 펼쳐질지 궁금해 자리를 뜨기 힘들었다.
이 책에는 실제로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실감 나는 대화들이 있었다.
비평을 업으로 삼던 지성은 한순간 품평 거리가 되었다. 그러면서 지성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을 미투 운동의 대상이 되며 몰락하게 된다.
지성은 아침에 일어나 벌거벗은 여자와 함께 있었다는 것만으로 평소와 같은 이성적인 사고를 하기 힘들었다.
자신이 맹한 여자,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일일이 알려줘야 하고 이해할 수 없는 맹한 '나채리'와 동거를 하게 된다.
처음엔 자신이 완력으로 취했을 거라고 생각해 나채리를 집 안에 둔다.
별거하고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아내가 전에 가정 폭력을 당했던 여자들이 하던 말을 생각한다.
그렇게 자신이 어리고 모르는 여자와 몸을 섞었다는 죄책감으로 나채리를 집 안에 들인다.
그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칼을 들이미는 게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조카 유경이나 민주 그리고 전소현까지 계속해서 위협으로 다가온다.
처음엔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고, 목적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의심했던 나채리는 그가 작중에서 유일하게 막 대할 수 있는 여성이었다.
채리가 제공하는 웃음이나, 음식, 살림, 잠자리 등에 익숙해지며 의심을 푼다. 의심을 푸는 걸 넘어 맹하고, 살기 쉽겠다고 단정 짓는다.
지성은 오랜 동료이자 대중의 사랑의 받는 민주를 성폭행하고 미투 운동의 가해자로 지목을 받으며 몰락의 길을 걷는다.
민주의 행동에서 이상함을 느끼지만 민주를 피하고, 그날 밤 일을 언급하기 꺼려 한다.
제대로 마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 우울증을 앓고 있던 민주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생을 마감하며 진실을 알 기회를 놓친다.
작중에서 지성은 비교적 일관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게 단서라는 점을 알지 못했다.

성폭행범에 살인자로 몰린 상황에서 이민주의 납골당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이민주의 오빠가 충분히 의심스러운 상황이지만 돈을 보내줌으로써 자신이 할 도리를 했다고 자위한다.


자신의 무고함과 자신의 몰락을 둘러싼 일들이 민주의 계획이었음이 밝혀진다.
그 후 자신을 대하던 많은 지식인들의 위선을 지성은 품평 받는 대상이 되어 마주한다.
또 조카 임유경의 성장을 생각하지만 자신도 달라짐을 느낀다.
자신이 여전히 이분법적인 사고를 해왔음을 알고 민주의 죽음을 다시금 생각한다.
자신이 맹하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곁에 머무르는 게 당연했지만 자신이 내쫓는 것도 쉬웠던 나채리를 그리워한다.
나채리가 음악을 따라 부를 때 능숙하고 정확한 발음이었던 게 자신의 영향일 거라고 조금은 바라며 우월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인다.
그의 무고함을 믿은 순간 상상도 못한 부분에서 계속해서 반전이 있었다.

지성은 제게 미용실에서 일했다는 채리가 실제로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고 대체 그 돈을 어떻게 가져다 썼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분명 의심스럽고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였는데도 그리워한다. 체온이 주던 안정감을 그리워한다.
그가 라디오에서 사회를 보며 저 남자는 여자와 잤을지, 남자와 잤을지, 잠자리를 최근에 하긴 했을지 등을 생각하며 자신의 지난밤을 생각했던걸 고려하면, 단순한 체온 만이 아니라 자신이 윽박지르고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을 그리워한 것은 아닐지 생각하게 된다.
담담하면서도 휘몰아치는 감정 묘사가 몰입감을 높였다.
지성이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이 몰락해 가는 상황을 지성의 입장에서 써 내려간 부분이 탁월했다.
지성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서 당황하는 모습이나,
인물들의 어조와 단어 선택에서 인물마다 다른 배경지식을 가졌고, 다른 세대를 살았음이 뚜렷해서 인물들을 관찰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고 순조롭게 망해가는 지성의 모습이 현실적이었다.
그가 하던 생각이나, 그가 안도하던 모습 그리고 그가 회피하던 모습을 통해 어떻게 잘도 살아왔구나 싶을 때 반전에 반전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한 번 펼치면 한자리에서 계속해서 읽게 되는 책이었다.
평론가에서 품평의 대상으로 전락한 지성의 입장에서 볼 때
대중들의 흐름, 지식인으로 불리는 이들의 위선이 살에 닿듯 느껴졌다.
또 마지막의 가장 큰 반전에서 나는 그제야 제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몸을 섞고 맹하고, 편하게 산다고 생각하면서도 남편에게 받은 학대의 흔적을 안타까워하던 채리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
지성이 느낀 경악을 느낄 수 있었고, 독자로서 통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지성은 이해하기 힘들고, 입체적이지 않고, 젠더 의식에만 치우쳐져 있어 아쉽다고 여성작가의 책을 평했다.
여성 작가의 소설 속에서 항상 여성은 강인하고, 항상 올바르고, 주관이 뚜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성이 휘두를 수 있고, 관계에서 항상 우월한 위치에서 내려다보던 인물 채리가
자신이 함부로 대하며 서도 평온함을 얻던 채리가
자신의 급을 인정받았다는 느낌을 준 존재 카야라는 점이 즐거웠다.


기억 없는 밤에 혼란스러워 하다가도 민주를 묘사하는 지성의 시선이 흥미로웠다.
민주가 가진 재주를 질투하다가도 자신은 실력으로 입증받았다며 자신을 위로한다.
그러다가도 끌렸음을 시인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인물을 통해 직접적으로 말하는 부분도,
인물의 생각을 통해 말하고 그걸 독자가 읽게 해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기회를 준다고 느꼈다.
또 집 안에 다른 사람을 들이는 과정이 기묘하게 자연스러웠던 점도 어떻게 보면 지성이 남자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지성의 생각을 통해 자연스럽고 아무렇지 않게 녹아있는 권력이 느껴졌다.
행간에서 읽히는 많은 것들이 몰입감에 파묻혀 책장을 끊임없이 넘기다가도
한숨 멈춰 생각할 기회를 주는 소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