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은 있는가요 - 정아은 추모소설집 marmmo fiction
장강명 외 지음 / 마름모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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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생전의 그녀는 세상과 치열하게 부딪쳤는데, 나는 편안한 소파에 앉아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 안온한 추모가 마냥 편할 수는 없었다. 여러 단편 중에서도 나는 최유안 작가의 「모두의 진심」에 오래 머물렀다. 막연한 불편함이 실체적으로 다가와서였다.

번역가로 고단하게 버티는 화자 ‘설아’의 시선을 통해 권력의 사다리를 놀이처럼 오르는 ‘현보’라는 인물이 드러난다. 8만 원짜리 코스 요리를 앞에 두고, ‘나라’를 명분 삼아 친구들을 스펙의 도구로 부리는 데 주저함이 없는 그. 정제된 그의 태도를 서늘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설아의 자각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소설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렸다. 고(故) 정아은 작가가 생전에 던진 화두가 역사 속 권력자에서 보편적인 개인으로 옮겨졌기에 발생하는 감각이었다.

생전 고인이 “왜 그들은 무릎 꿇지 않는가?”라며 확신범의 내면을 끝없이 추적했다면, 최유안 작가는 그 시선을 가져와 질문의 칼날을 내 옆자리로 끌고 왔다. 이제 확신범의 얼굴은 역사 속 권력자의 초상이 아니었다. 나와 함께 밥을 먹고, 마주 앉아 웃는 보통 사람의 것이 될 수 있었다. 절대 권력자는 사라졌지만, 그 논리와 태도는 파편화되어 개개인의 내면에 숨어있을지도 모를 일. 어쩌면 그 얼굴이 내 것일 수도 있다는 섬찟한 자각이 들었다. 악의가 없기에 더 바로잡기 힘든, 각자의 ‘진심’들이 빚어내는 모습을 소설은 펼쳐 보였다.

『엔딩은 있는가요』는 마음껏 슬퍼할 권리를 주기보다, 마땅히 감당해야 할 질문의 무게를 건넨다. 이것이 마치 고인을 기리는 치열하고도 정직한 방식이라는 듯이…. 최유안 작가는 작품을 통해 정아은 작가에게서 ‘용기’를 물려받았다고 고백한다. “내 글로 하고 싶은 말을 하며 살아가겠다”라는 그녀의 다짐을 보며 생각했다. 용기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태도이기도 하지만, 듣기 싫은 말을 끝까지 듣게 만드는 태도이기도 하다고. 그렇다면 이 책은 분명 용기 있는 책이다. 독자에게 편안한 망각을 허락하지 않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별이 닥쳤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상실을 껴안는 일에 명쾌한 해법도 없다. 다만 잊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하나 있다. 잎이 진 자리에도 언젠가는 겨울눈이 맺힌다는 사실이다. 슬픔을 땔감 삼아 얼어붙은 시간을 녹이는 것도, 눈물을 흘려서 마음을 씻어내는 것도, 아끼는 책에 볕이 들도록 책장을 넘겨주는 것도 헤어짐을 견디는 방식일 것이다. 부재가 만들어낸 구멍을 이야기로 메우며, 한 영혼이 지녔던 정신을 잊지 않으려는 아홉 명의 시도처럼 말이다.

책장을 덮었는데도 엔딩은 오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그녀가 없는 세상에서 속절없이 그녀의 문장을 다시 펼친다. 봄은 멀고, 읽어야 할 페이지는 아직 많이 남았다. 그렇기에 확신했다. 이 책은 고인의 삶을 끝맺는 에필로그가 아니라고. “우리는 한 번 마음에 담았던 사람을 잊지 못한다. 마음에 담고 다니며 끊임없이 소환해 그리워한다”라던 정아은 작가의 문장처럼, 영원히 그녀가 쓰이고 읽히기를 나는 바랐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을 마음에 담는 일이며, 남겨진 우리가 ‘엔딩’을 유예하는 방식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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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침몰한다고? -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지진의 공포|동일본 대지진 경험자의 실존 생존 매뉴얼
나운영 지음 / 책이라는신화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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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질 줄 몰랐던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질 때, 사람은 비로소 삶의 구조를 돌아본다. 그게 꼭 지진 때문일 필요는 없다. 계획 없는 퇴사, 갑작스러운 상실, 문득 찾아온 고립감 같은 것만으로도 마음속 기둥 하나쯤은 쉽게 금이 가니까.

<<일본이 침몰한다고?>>는 그런 균열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거대한 흔들림에서 작가는 무너진 일상을 다시 쌓아 올리기 시작한다. 가구 배치며 구호 물품이며 잠옷의 재질까지 꼼꼼하게 살피는 까닭은 단 하나,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나하나의 선택이 쌓여 불안을 견디는 단단한 기둥이 되어준다는 사실을, 흔들림 속에서도 마음의 중심을 붙드는 일이 곧 살아내는 일이라는 진실을 이 책은 집요하게 증명해 보인다.

책을 읽고 나면 알게 된다. ‘살아남는 법’을 고민하다 보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물음에 닿게 됨을. 재난에 대비한다는 건 그저 위기를 피하는 기술이 아니라 삶을 정돈하는 일이었다. 지켜야 할 것, 버려야 할 것,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들여다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대비가 구체적일수록, 정돈이 생활화될수록 흔들림 앞에서 더 오래 설 수 있다.

누구에게나 불쑥 찾아오는 ‘삶의 진동’을 떠올려본다면, 일상을 재정비하는 작가의 분투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진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저마다의 위태를 통과하며 살아가고, 그때마다 삶을 지탱할 무언가를 찾기 마련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일본이 침몰한다고?>>는 재난에 관한 보고서이자, 일상을 향한 연서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평온을 지키려는 한 사람의 노력이 결국 모두의 이야기로 번져가는 걸 보면 그렇다.

문득 바랐다. 삶이 휘청이는 날에도 나를 지켜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재난용 가방처럼 꺼내쓸 수 있는 무언가를 마음 한편에 준비해두고 싶었다. 손전등이나 작은 생수 한 병처럼 손에 잡히는 명확한 방식으로 ‘마음의 방재책’을 마련할 수 있을까.
어쩌면 사소한 순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겠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일, 좋아하는 이불을 꺼내는 일처럼 별일 아닌 순간에 더욱더 살아가고픈 마음이 들기도 하므로. 내 삶의 작은 손잡이 같은 그때를 나는 오래도록 행복이라 불러왔다.

사람은 사소한 행복에서 다시 살아낼 힘을 얻는다고 나는 믿었다. 하지만 정작 재난이 닥치면 그런 것들이 아무 소용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더욱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 문손잡이 하나마저도 삶을 지키는 조건이라면, 나는 빈방을 마련해두려고 한다. 세상이 뒤흔들려도 당신과 나의 안위를 위해 준비해둔, 아주 사적인 대책이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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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남기는 사람 - 삶을 재구성하는 관계의 법칙
정지우 지음 / 마름모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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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남기는 사람》을 읽으며,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문장은 "스스로에게 정직해야 하고, 스스로의 책임을 끌어안을 줄 알아야 한다"는 구절이다. 종종 내 상황이나 감정을 외면하려 했던 때가 많았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의 실수나 개인적인 갈등이 생기면, 자주 상황을 회피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곤 했다. 불편한 감정이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힘들었다. 하지만 작가의 말처럼, 진정한 성장은 나 자신을 직면하고 책임을 지는 과정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 책임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변화의 동력으로 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장의 시작임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내가 나를 이해하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었다. 이제는 외면했던 감정과 현실을 마주하며, 그 안에서 진정한 나를 찾고, 예전엔 피했던 대화도 적극적으로 나누려는 마음가짐이 생겼다.

“스스로에게 정직해야 하고, 스스로의 책임을 끌어안을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어른이 되지 못하면 결국 그 화살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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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권이 완료되었습니다 - 오늘을 살아가는 너에게, 여행이라는 선물
권혜경 지음 / 오늘산책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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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여행 에세이를 자주 읽진 않는다. 여행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여행을 너무 좋아해서 그렇다. 읽으면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에 며칠을 끙끙 앓곤 한다. 그게 싫어서 여행 에세이는 되도록 피하는 편이다. 그런데......

내가 미쳤지, 여행 에세이를 읽어 버렸다. <<발권이 완료되었습니다>>라는 제목에 한 번 흔들렸고, 여행사를 운영한다는 저자의 이력에 두 번 흔들려서 어쩔 수가 없었다. 궁금했다. “오대양 육대주의 70여 개 나라와 수많은 도시를 발로 밟은” 사람은 여행을 어떻게 즐기나 하고.

괜히 읽어서 버킷리스트만 늘어났다. ‘알쓰인 남편과 유럽 맥주 투어하기’와 ‘일본어 잘하는 남편과 일본 도시락 여행하기’. 안 그래도 이루고 싶은 일이 많은데, 휴우. 하고 싶은 일을 다 해 보고 죽으려면 오래 살아야겠다 싶어서, 괜히 밥 한술 덜 먹고 한 걸음 더 걷고 했다.

권혜경 작가는 여행을 두고 “평생 꺼내 쓸 해피 카드”라고 말했다. 얼마나 멋진 표현인지, 나도 작가처럼 해피 카드를 발급받고 싶어졌다. 지금 당장 가진 게 많지 않더라도, 기억 속에 쌓아둔 경험들로 언제든 행복을 결제할 수 있을 테니까.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뮌헨의 혼탕 사우나에 관한 이야기였다. 낯설고도 아찔했을 그 공간에서 작가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혼탕의 문턱을 넘었다. 그 뒤로 작가는 여행 중 해 볼까 말까 고민되는 일이 생기면 무조건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안 하면 반드시 후회한다는 것을, 아니 후회한다 해도 해 보고 후회하는 것이 더 낫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라고.

작가의 말을 읽는 순간, 내 버킷리스트가 떠올랐다. 유럽 맥주 투어하기도, 일본 도시락 여행하기도, 어떻게 보면 쉽게 이룰 수 있는 꿈인데 혼자 막막하게 느꼈다. 사실 이보다 더 소소한 꿈도 많은데. 살사 배우기나 크로와상 만들기 같은. 그런데도 나는 늘 ‘할까 말까’ 고민만 했다. 예산, 시간, 체력을 핑계 삼아 뒤로 미루고, 나중에는 이루고 싶단 마음마저 흐릿해져 버릴 때까지.

생각했다. 여행은 어디론가 떠나는 일이 아니라, 망설임을 넘어서는 일이라고. 망설임 뒤에 있는 나를 발견하는 일이야말로 여행의 진짜 목적지가 아닐까.

책을 덮고 나니 문득 마음이 분주해졌다. 작가처럼 나도 “경험한 자의 여유”를 부리고 싶었다. 이제는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지워나갈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여행이든, 아니든 내가 원했던 어떤 일이든, 결국 해피 카드는 스스로 발급하는 것이니까.

이제 선택만 남았다. 나만의 여행을 시작하는 일. 시작만 한다면 그것은, any way, happy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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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4-12-17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말이네요, ‘평생을 꺼내 쓸 해피 카드‘
anyway happy way도 그렇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