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공장 노는날 그림책 22
안오일 지음, 신진호 그림 / 노는날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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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책 한 권을 손에 쥐고

서울 도심을 걸었습니다.

안오일 글, 신진호 그림의 그림책 《기억 공장》.

노는날 출판사에서 펴낸 이 책은 제주 4·3 사건 당시

수용소로 사용되었던

주정 공장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공장이 화자입니다.

공장이 기억합니다.

공장이 노래합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가만히 집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는

공간에 직접 가서 서 있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걸었습니다.

먼저, 기억해야 할 이야기 — 제주 4·3

1947년 3월 1일. 제주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경찰이 군중에게 총을 쏘았고,

이에 항의하는 민심이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48년 4월 3일,

미군정과 우익 청년단의 탄압에

맞선 저항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이른바 제주 4·3 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1954년까지 약 7년간,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또는 다를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제주도민 2만 5천~3만 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갓난아이들이 함께 죽었습니다.

제주 전체 인구의 10분의 1이

사라진 셈이었습니다.

더 오래 아픈 것은, 이 사건이

수십 년간 말할 수 없는 역사로

묻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피해자들은 빨갱이로 낙인찍혀

침묵 속에 살았고, 가족을 잃은 슬픔조차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건을

인정하고 사과한 것은 2003년의 일이었습니다.

그 오랜 침묵 사이,

제주의 주정 공장은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기억의 공간

—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서울역 1번 출구를 나와 걸었습니다.

수제화 골목을 지나,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면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이 나옵니다.

이곳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때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되었던

서소문 밖 네거리 처형장,

그 터 위에 세워진 박물관입니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멈췄습니다.

공간이 말을 걸어오는 느낌이었습니다.

하늘이 열린 '하늘광장',

지하로 내려갈수록 깊어지는 정적,

순교자들의 무덤 앞에서

나는 이유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이곳이 기억하는 것.



1800년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죽음은 오랫동안 덮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공간은 그 터 위에 다시 세워져, 기억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기억 공장》 속 주정 공장이 겹쳐 보였습니다.

제주의 공장도 그랬습니다.

고구마로 알코올을 만들던 평범한 공간이

어느 날 사람들을 가두는 수용소가 되었습니다.

공장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난 감옥이 아니에요."

그러나 공장은 그 기억을 다 담았고,

지금도 그 터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서소문의 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억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공간이 증언합니다.



두 번째 기억의 공간 — 광화문 광장


서소문을 나와 광화문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얼마 전 이 광장에서 BTS 공연이 열렸습니다.

수십만 명이 이 자리를 가득 채웠고,

그 노래와 빛과 함성은 이 공간에 새로운 기억 하나를 더했습니다.

그런데 광화문을 바라보며 서 있다 보니,

이 공간이 품고 있는

훨씬 더 오래된 기억들이 천천히

겹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세종대왕 동상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세종대왕은 기억을 설계한 사람이었습니다.

훈민정음. 글을 모르는 백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기록하고 전할 수 있도록 문자를 만들었습니다.

기억은 기록되어야 살아남는다는

것을 그는 알았던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 광장은 기록과 함께 저항의

기억도 안고 있습니다.

2016년 겨울, 이 자리에 촛불이 켜졌습니다.

하나둘 모인 불빛이 광장을 가득 채웠고,

그 빛은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을 말하기 시작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 광장에 새겨졌습니다.

광화문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늘 시민들이 모여 외치는 자리였습니다.

민주화를 향한 함성이 울렸고,

슬픔을 나누는 추모의 촛불이 타올랐으며,

때로는 기쁨과 응원의 노래가 흘렀습니다.

그러나 제주 4·3의 희생자들은 오랫동안

이런 광장에 나올 수 없었습니다.

이름을 남기는 것도,

슬픔을 말하는 것도 금지된 시절이 있었습니다.

광장에서 외칠 권리조차 없었던 사람들의 기억.

기록되지 못한 기억은 얼마나 오래 아팠을까요.

그리고 또 하나의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해녀들이 바다에서 서로에게 불러주던 노래.

험한 파도를 넘을 때, 무사히 돌아오라는 인사로 주고받던 노래.


수용소 안에서 절망하던 사람들 사이,

애기 해녀 찬희가 끝내 혼자서라도 불렀던 그 노래.

촛불 광장을 채웠던 사람들의 노래처럼,

BTS의 음악이 광장을 가득 메웠던 것처럼

— 어떤 노래는 공간에 새겨집니다.

공간은 노래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노래들은 모두,

살아남은 자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인사였는지도 모릅니다.

무사히 돌아오라고. 우리 함께 살아남자고.

기억을 담는 공간들이 말하는 것

오늘 두 곳을 걸으며 이상한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도, 광화문 광장도,

제주의 주정 공장도 — 모두 처음엔 평범한 공간이었습니다.

처형장이 아니라 사람들이 오가던 길이었고, 광

장이 아니라 그냥 넓은 마당이었고,

수용소가 아니라 그냥 공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사가 그 공간에 상처를 새겼습니다.

그리고 그 공간들은 지금도 그 자리에 서서,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있느냐고.

《기억 공장》이 그림책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 건,

아마도 이 책이 정말로

기억의 힘을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주 4·3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공장이라는 공간의 시점에서,

이어도 사나라는 노래를 통해

— 어렵지 않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게 전합니다.

유아용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사실 이 책은 기억하기를 멈춘 모든 어른을 위한 책입니다.

오늘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

천주교 박해의 기억, 세종대왕과 훈민정음의 기억,

광화문 광장에 새겨진 노래들,

그리고 제주 4·3의 기억.

이 모든 것이 우리 일상의

공간 안에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공간은 기억합니다.

우리가 기억해 주기를 기다리면서.

그 노래에 답해 주기를. 기억하겠다고, 말해 주기를.


《기억 공장》 안오일 글 · 신진호 그림 · 노는날 출판사 2025 문학나눔 선정도서 · 한겨레 추천도서

그림책이지만 어른이 먼저 읽어야 할 책.

제주 4·3을 처음 아이에게 설명하려는 부모에게도,

역사를 감성적으로 되새기고 싶은 어른에게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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