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소문을 나와 광화문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얼마 전 이 광장에서 BTS 공연이 열렸습니다.
수십만 명이 이 자리를 가득 채웠고,
그 노래와 빛과 함성은 이 공간에 새로운 기억 하나를 더했습니다.
그런데 광화문을 바라보며 서 있다 보니,
이 공간이 품고 있는
훨씬 더 오래된 기억들이 천천히
겹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세종대왕 동상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세종대왕은 기억을 설계한 사람이었습니다.
훈민정음. 글을 모르는 백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기록하고 전할 수 있도록 문자를 만들었습니다.
기억은 기록되어야 살아남는다는
것을 그는 알았던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 광장은 기록과 함께 저항의
기억도 안고 있습니다.

2016년 겨울, 이 자리에 촛불이 켜졌습니다.
하나둘 모인 불빛이 광장을 가득 채웠고,
그 빛은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을 말하기 시작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 광장에 새겨졌습니다.
광화문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늘 시민들이 모여 외치는 자리였습니다.
민주화를 향한 함성이 울렸고,
슬픔을 나누는 추모의 촛불이 타올랐으며,
때로는 기쁨과 응원의 노래가 흘렀습니다.

그러나 제주 4·3의 희생자들은 오랫동안
이런 광장에 나올 수 없었습니다.
이름을 남기는 것도,
슬픔을 말하는 것도 금지된 시절이 있었습니다.
광장에서 외칠 권리조차 없었던 사람들의 기억.
기록되지 못한 기억은 얼마나 오래 아팠을까요.
그리고 또 하나의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해녀들이 바다에서 서로에게 불러주던 노래.
험한 파도를 넘을 때, 무사히 돌아오라는 인사로 주고받던 노래.
수용소 안에서 절망하던 사람들 사이,
애기 해녀 찬희가 끝내 혼자서라도 불렀던 그 노래.
촛불 광장을 채웠던 사람들의 노래처럼,
BTS의 음악이 광장을 가득 메웠던 것처럼
— 어떤 노래는 공간에 새겨집니다.
공간은 노래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노래들은 모두,
살아남은 자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인사였는지도 모릅니다.
무사히 돌아오라고. 우리 함께 살아남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