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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와 바나나 ㅣ 테마 소설집
하성란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4월
평점 :
단편소설은 단도(短刀)이다. 이순신 장군의 '수루에 홀로 앉아 큰칼 옆에 차고'의 큰칼이 주는 장엄함이나 힘은 없다. 날이 잘 선 단도로 복숭아 속살 같은 가슴이나 봄날 새순같이 여리디 여린 손끝을 '쓰윽'하고 베는 순간의 서늘한 아픔, 비통함, 떨어져 내리는 핏방울의 처연함, 거기서 오는 깨달음까지 단편소설은 그저 아름답다. 서사구조가 중요한 장편소설과는 달리 단편소설은 순간적이고 감각적이며 메타포의 힘으로 깊은 의미를 전달하기에 단언코 문학의 꽃이고 정수이며 최고봉이다.
이런 단편소설과 역사와의 조우. 어떤 개인도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의 역사는 대부분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간의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전쟁도 그 원인은 거의 정치와 연관 지어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역사가 곧 정치는 아님을, 정치에서부터 예술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인간들의 삶의 총화임을 한눈에 보여주는 책들이 있다.
한겨레 출판 문학웹진 <한판>에 연재되었던 단편소설들을 모은 소설집 두 권이 탄생했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소재로 총 26명의 작가들이 참여한 역사테마 소설집이다.
15년이란 등단 연차를 지닌 기성과 신인작가 13명이 지나간 역사의 폐허 속을 탐사하며, 찾아낸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각기 다른 상상력의 옷을 입혀 오늘 날 우리의 이야기로 재탄생시킨 <키스와 바나나>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미국적인 작가 피츠제럴드의 아내 젤다로부터 (하성란의<젤다와 나>)조선 세조 때의 소경 점복가 홍제관의 이야기 (이영훈의 <상자>) 대구 지하철 참사 현장의 경험 (조영아의 <만년필>) 베트남전 참전군인 키스의 상처(황현진의 <키스와 바나나>)에 이르기까지 이 13편의 이야기들은 역사는 결코 흘러가버린 잊혀진 이야기가 아니라고 항변한다. 13명의 소설가들이 진지한 시선으로 멋진 상상력을 더하여 되살려 낸 작품들은, 때로는 우화와 풍자로 때로는 판타지로 때로는 현실로 우리에게 다가오며 단편소설의 매력을 한껏 뽐낸다.
역시 19년이란 등단 연차를 넘어서 기성과 신인작가가 함께, 낡고 잊혀진 역사의 책장을 들추고 시간의 모퉁이를 더듬어 캐어낸 기억을 주제로 변주시킨 <한밤의 산행>
아우라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철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발트 벤야민은 <일방통행로>라는 글에서 '감각들이 머릿속에 둥지를 틀고 있지 않다는, 다시 말해 창문과 구름, 나무가 우리 두뇌 속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보고 감각하는 바로 그 장소에 깃들고 있는 것이라는 학설이 옳다면, 사랑하는 여인을 바라보는 순간 우린 우리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감각 즉 기억은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감각하는 장소나 상황 속에 깃든다는 것이다. 이 '기억'을 주제로 한국 문단을 이끌어가는 13명의 작가들이 다양한 개성을 빛내며 각자의 문체와 주제로 변주해낸 작품집이다.
박재상이 '왜'에서 왕자를 구하던 삼국시대 (조영석의 <추구>)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던 만주의 하얼빈 (장강명의 <유리 최 이야기>) 재개발 지역 철거 반대 투쟁을 다룬 21세기의 대한민국 (김혜진의 <한밤의 산행>)에 이르기까지, 잊혀지고 흘러가버린 과거 속의 역사를 기억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현재를 살고있는 우리 앞에 복원시킨다.
한 작가의 단편소설들을 엮어낸 작품집만 읽어도 다양한 산해진미를 맛 본 기분이 드는데, 무려 26명의 작가들이 빚어낸 잔칫상을 받고보니 마음이 그득하다. 함께 이 책을 읽은 우리는, 이제 상호연결된 공동체가 된다고 한다.
상상력과 기억의 힘으로 우리를 공동체로 묶어
같은 역사의 경험을 공유하게 해 준 책
이 책은 26명의 작가가 각기 자아를 드러낸 솔직한 몽타주이며
역사에 바치는 그들만의 찬란한 오마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