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타킨테'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중1 여름방학,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읽었던 소설 <뿌리>의 주인공 이름은 사춘기 소녀의 가슴에 화인처럼 찍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억압과 자유의 상징이 되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말을 좋아한다. 모든 인간이 각자 다른 자리에서 다른 모습으로 다른 운명을 타고 태어났지만 인간으로서 가지는 존엄함은 모두 평등하다는 뜻이다.
적어도 살아오는 동안에 만나서 맺어지거나 스쳐지나간 수많은 인연들을 대할 때, 그 어떤 기준으로도 상대방을 멸시하거나 억압한 적 없이 진심으로 존중하려고 애썼다는 것만은 자부할 수 있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존중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반상의 차별과 직업의 귀천이 없는 21세기의 오늘 날, 지구상 곳곳에 행해지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억압은 그 폭력성과 잔인함에 있어 이미 도를 넘어서고 있다.
우리는 평등과 인권이라는 말이 물처럼 흘러넘치는 시대에 비인간적인 비참한 삶을 살고있는 현대판 노예들이 존재하는 현실을 외면하며 살고있다. 우리 모두의 눈과 가슴에 오래 전 노예의 삶을 살았던 한 남자의 이야기가 비수처럼 날아와 아프게 꽂힌다.
처음엔 소설인 줄 알았던 작품이고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의 원작으로 관심을 가졌는데 놀랍게도 당사자가 160여년 전에 기록한 실화였다. 그의 이름은 솔로몬 노섭. 1808년 노예제도가 폐지된 뉴욕주 미네르바에서 태어나 자유인으로 세 아이를 둔 한 가장의 가장으로 바이올린 연주자로 성실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일자리를 찾으러 워싱턴에 갔다가 꾐에 빠져 노예상인에게 납치되고 만다. 그것도 악명 높은 노예상인 제임스 버치에게 팔린 후 머나먼 남부 뉴올리언스 주로 끌려가 무려 12년 간 노예의 비참한 삶을 살게 된다.
물건처럼 사고팔리기를 되풀이하며 탈출을 시도하기도 하며 가축처럼 목에 올가미를 매기도 하고 끊임없는 폭력과 학대에 시달렸다. 하루종일 중노동에 시달리며 헐벗고 굶주렸다. 그러나 그는 한시도 자유를 향한 열망을 버린 적이 없이 끊임없이 탈출을 계획하고 추진하여 1853년 극적으로 구조되어 마침내 가족의 품에 다시 안겼다.
그후 솔로몬 노섭은 12년 간의 노예 생활을 자세하게 정리한 자서전 <노예 12년>을 발표한다. 이 작품은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고 학대하는 노예 제도의 본질과 실상과 문제점을 사실적으로 그려내 흑인 문학의 원천으로 자리매김 되었고 노예 해방의 도화선의 역할을 하게 된다.
작품을 읽는 내내 허구가 아닌 실화라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인간의 잔혹함과 악함에 인간임이 부끄럽고 좌절감과 공포가 마음을 짓눌렀다. 그러나 솔로몬 노섭의 자유를 향한 의지와 열망과 믿음은 결국 그를 가족의 품에 안기게 했다. 절대악 앞에서도 끝내 좌절하지 않고 고난을 이겨내고 자유의 빛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선의의 승리를 보여 준 작품이다.
문제는 이 작품을 비단 160여년 전 불운에 맞닥뜨린 한 흑인남자의 회고록으로만 읽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노예제도가 존재하던 과거 역사의 일부분으로써가 아니라 오늘 날의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로 들여다봐야한다는 잔인한 진실.
굳이 멀리가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고있는 이 땅에도 수없이 많은 솔로몬 노섭이 있다. 질시와 차별과 인간이하의 불합리한 대우를 받으며 인간이지만 인간으로부터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 잊을 만하면 메스컴을 장식하는 현대판 노예들의 이야기들을 우리는 한낱 일시적인 흥밋거리로만 여기고 있는 건 아닌지 자신의 양심에 준엄한 질문을 던져 보아야할 것이다.
진정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 지녀야할 덕목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하는 책. 타인과의 관계맺음에서 자신은 갑으로 상대는 을의 위치로 자리매김하고 상대를 무시하고 억압하려한 적은 없는지 성찰해 보게 하는 책.
적어도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의 마음 속 들판에는 그 어떤 편견도 질시도 차별도 없는 자유와 정의와 존중이 향기로운 들꽃처럼 가득 피어나길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