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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인
쓰카사키 시로 지음, 고재운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불로장생'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류 최대의 욕구이며 풀지 못한 과제. 중국의 진시황제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방으로 사람들을 보내었고, 그것을 이루지 못한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피라미드속에서 영생을 꿈꾸었다. 신비의 약초나 샘물로 상징되던 영원한 삶을 위한 처방은 현대에 이르러서는 과학과 의학의 옷을 입고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을 냉동시켜 미래에 다시 살려낼 수 있다거나, 유전자 복제를 통해 또 다른 나를 만들어 내는 일도 불가능해 보이지 만은 않다. 그러나 이미 수 많은 책들과 영화들이 그 부작용을 지적하며 진정 인간의 유한한 삶속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물어오곤 했다.
이 끈질긴 물음을 가져와, 과학의 발달과 영생의 욕망을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잃을 뻔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펼쳐보인 소설 '무명인'. 축하 받아야 할 자신의 생일, 일러스트레이터 도리야마 도시하루가 결혼 후 맞게 된 첫 생일에 자신의 집에서 마주한 것은 아내의 시체였다. 그러나 그 순간 전화벨이 울리고 전화를 받은 그의 귀에 들린 건 아내의 목소리였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휩쓸리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죽음의 위기에 직면하며 추격과 위협을 받게 된다.
'당신은 누구인가?'
'아니, 나는 누구인가?'
일러스트레이터 도리야마 도시하루와 화학연구소 주임연구원 다카나시 헤이치. 이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 주인공의 정체성은 도리야마인가, 다카나시인가? 아니 어느 누구도 아닌 무명인인가? 처음에는 해리성 인격 장애 즉 다중인격을 다룬 소설인 줄 았았다. 하지만 불로불사의 명약이라고 할 수 있는 바이러스 연구가 원인이었다. 인간의 기억을 전사한 레트로 바이러스가 숙주인 육체가 죽을 것 같으면 다른 몸으로 들어가 그 기억을 전사하며 언제까지나 살 수 있다는 것.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의 기억이 뇌속으로 들어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타인의 삶을 살게 된 주인공이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아 가는 이야기이다.
나는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이다. 나를 나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외모와 이름뿐 만이 아니라 머리와 가슴속에 담겨져 있는 수 많은 기억과 추억들 그리고 감정들이다. 이것들이 사라져버린 나를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비록 생명은 연장될 지 모르지만 정체성을 잃어버린 삶이 과연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인지 되새겨 볼 일이다.
" 내가 뭘 하는 거냐고? 글쎄 내나이를 느끼고 있다고나 할까. 꼼짝도 하기 싫군, 헛살았다는 느낌이 해마다 강해져. 언제부터 이런 인간이 된 걸까. 이래 봬도 체념은 안 하는 편이었는데, 그런데 이게 뭐지? 이런 곳에서 대체 난 뭘하는 거냐고? 나이를 먹으면 정말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어지는군."
소설속 추격자인 이 사람은 그래도 행복하다. 적어도 나이와 회한과 체념이라는 자신만의 감정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이름이나 일이 바뀐다 해도 사람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건 변하지 않아. 인간성은 안 변해. 난 그런 사람과 사귀어 온 거야. 앞으로도 그런 사람하고 사귀어 갈려고 생각하고 있어."
그 어떤 과학기술이나 의학으로도 바꿀 수 없는 인간의 본질 즉 인간성의 가치에 대해 일깨워 주려는 작가의 메시지가 가슴에 와 닿았다.
그러나 기억을 전사하는 바이러스의 존재와 바이러스가 주인공에게 들어가는 과정은 진부하게 느껴졌고 , 사건들의 얼개들도 그리 긴박감이 넘치거나 흥미롭지는 않았다. 단지 아내의 살해범이 누구인지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궁금증을 유발시켰다.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고 우연히 쫓기는 주인공을 도우면서 끝까지 함께 한 지아키라는 인물의 입을 빌어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 생명이란 건 어쩌면 아름다운 기적이라고 말이에요."
그 기적은 내게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아름답고 귀하고 애틋한 게 아니겠는가.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비록 비에 젖은 빨래처럼 때론 후줄근하게 때론 쓸쓸하게 살다가, 봄밤에 뚝 떨어져 내리는 목련꽃 송이처럼 스러질지언정 생명은 위대하고 사랑스럽고 가슴 저리다.
마지막 순간, 두 주먹만 허허롭게 쥐고 떠나더라도 서로의 어깨가 비에 젖지 않도록 우산을 기울여 주는 손길.
그 마음이 있어 삶이란 유한의 물줄기에 기꺼이 나를 맡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