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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가루 백년 식당
모리사와 아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샘터사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백 년 전 어느 봄 밤, 당신의 머리 위로 사뿐히 내려앉던 벚꽃 한 잎이 백 번의 봄을 지나 오늘 또 다른 당신의 머리 위로 살포시 떨어져 내린다. 그 순간 달빛은 더욱 고요히 빛나고 바람결에 출렁이던 호수의 물결마저 일렁임을 멈춘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벚꽃 잎에 실려 백 년을 건너 온 변치 않은 마음을 느끼고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인간의 수명은 백 년을 살아내기가 힘들다. 요즘은 백세 시대라는 말을 종종 쓰지만, 대를 잇지 않고서는 백 년이란 시간을 지켜내기가 쉽지 않다. 인간의 육신은 사라져도 백 년을 이어올 수 있는 비법은 단 하나 바로 '마음'이다.
이미 <무지개 곶의 찻집> <당신에게>로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에 위로와 온기와 감동의 눈물을 전했던 모리사와 아키오가, 이번에는 4대가 마음을 이어 가업을 계승해 가는 한없이 따스한 이야기 <쓰가루 백년식당>으로 우리를 찾아왔다.
가업을 계승한다고해서 대단한 성공담을 기대한다면 분명 실망할 것이다. 여기에 거창하고 훌륭하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그런 이야기는 없다. 오히려 너무나 평범하고 소박한 가족같고 이웃 같은 사람들이 있어 더 애달프고 정감이 간다.
일본 아이모리현 벚꽃이 유명한 쓰가루 지방에서 먹으면 마음이 따스해지는 메밀국수를 파는 오모리 식당. 메이지 시대의 초대 주인 오모리 겐지로부터 가업을 잇기를 희망하는 현대의 4대 오모리 요이치까지, 백 번의 봄이 찾아오고 벚꽃이 백 번을 피고 질 때까지 그대로 이어져 온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낡을 대로 낡아 빛이 바랜 포렴과 변함없는 국물 맛을 지켜온 것은, 바로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들의 연결된 마음이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 마음에 대해서 오모리 가족들이나 주변 인물들이 각자의 입장과 관점에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낼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소설을 읽어가는 동안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둔 객관적인 제 3자의 입장에서, 관찰자의 시선으로 여유롭게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오모리 식당의 4대 오모리 요이치와 여자 친구 쓰쓰이 나나미 두 청춘의 이야기가 주요 뼈대를 이룬다. 같은 고향의 선후배였으나 도쿄에서 만나게 된 두 사람. 많은 젊은이들이 거치는 통과의례 즉 도시에서 자신의 화려한 꿈을 이루고 싶은 욕망과 귀향의 욕구 사이에서 갈등한다. 공중에 떠다니는 잡고싶은 오색 빛깔 풍선과 두 발 딛고 살아가야할 현실 속에서 흔들린다. 두 사람은 수없이 오해와 갈등으로 마음 속 감옥을 짓고 허물며 서로를 향해 조심스럽게 그러나 당당하게 자신의 진심을 밀고 나아간다. 확실히 매듭짓지 않고 가능성을 열어둔 채 마무리되는 엔딩이 참으로 좋았다.
자식의 꿈을 믿고 응원하는 아버지의 속 깊은 부정, 학창시절부터 오모리 식당의 계승이 자신의 꿈이었음을 깨닫는 아들의 효심, 이들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맑고 따스하고 유쾌한 인간미가 벚꽃보다 더 예쁘게 피어나는 소설이다.
우리나라에 비해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일지라도 가업을 이어가는 전통이 살아있는 나라 일본, 내심 그런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놀랍고 부러웠다. 그 비법은 가업에 대한 자부심과 장인 정신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서로를 이어가는 따스한 마음이었던 것이다.
어찌보면 참으로 단순하고 가벼운 이야기이다.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로 독자의 감정선을 건드리는 일본 소설의 특징을 잘 살린 작품이다. 초등학생이 읽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쉬운 문체, 특별히 메타포가 뛰어나거나 문학성이 돋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독자를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다.
백 년을 이어 온 메밀국수의 깔끔하고 구수한 국물 맛처럼, 깊고 순수한 진심이 수 백 그루 벚꽃처럼 만개하여 우리의 가슴에 꽃비를 내린다. 꽃잎들은 마침내 가슴속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덮어주며 꽃길을 만든다.
한 권의 책이 주는 온기로 마음이 치유되고 딱지가 앉는 시간
바람이 불어오는 저물녘, 벚꽃 잎이 흩날리고
그 사이로 오모리 식당의 빛바랜 포렴이 세월처럼 펄럭인다
백 년의 시간이 언뜻 한 순간인 듯 기지개를 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