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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너처럼 좋아졌어 - 여전히 서툰 어른아이 당신에게 주고 싶은 다시 삶을 사랑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시 90편
신현림 엮음 / 북클라우드 / 2014년 1월
평점 :
10대 때 시는 소녀의 순결하고 아름다운 기도였고 잡을 수 없는 북극 하늘의 오로라처럼 신비로운 것이었다.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햇빛처럼 꽃보라처럼
또는 기도처럼 왔는가
행복이 반짝이며 하늘에서 몰려와
해를 거두고 꽃피는 나의 가슴에 걸어온 것을
하얀 국화가 피어있는 날
그 짙은 화사함이 어쩐지 마음에 불안하였다
그날 밤늦게 네가
내 마음에 닿아왔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20대 때 시는 삶의 목표였고 뜨거운 불덩어리였고, 아픈 생채기를 감싸주는 반창고였다가 끝내 실체없이 사라져간 사막의 신기루였다. 나이 스물이 넘어 처음 시의 세계에 발을 디뎠을 때 산문을 썼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정서적 충격을 느꼈다. 24시간 오로지 시만 생각한 날도 있었고 캄캄한 새벽 잠결에 문득 떠오른 시상이 달아날까 불을 켜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종이에 옮겨 적어보던 시를 향한 열정. 한때 나의 시가 나의 마음을 떠나 다른 이들에게 가 닿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그 열병은 오래가지 못했고 시는 나의 정신적 허영과 취미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시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하며 시와의 이별을 고했다. 기형도의 빈집에 나를 가두었다.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그리고 그 뒤로 오랫동안 시와 눈길을 맞추지 않았다. 너를 버린 것이 부끄러워서,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걸 들킬까봐,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동경으로 마음이 흔들릴까봐, 스스로를 차단 시키고 살았다.
참으로 긴 시간을 건너 마주하게 된 시선집, 제목이 가벼워서 표지가 예뻐서 다양한 시를 맛볼 수 있을 거 같아서 신청했다. 그러나 막상 받아들고는 왜그리 마음이 무거웠는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인생이 힘들고 어려워 방황하는 어른아이들에게 꿈과 열정을 살려주려고 엮었다는 신현림 시인의 말처럼, 그냥 읽고 위안받고 행복감을 느끼면 되는 것을. 아마도 책 속에 오래 전 시를 버린 내 모습이 있을까봐 다시 흔들릴까봐 두려웠나보다. 그래서 마치 만지면 안 될 물건이라도 되듯이 진저리치며 관심없는 척 여기 저기 뒤적이며 성의없이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시는 시였다. 한없이 슬프고 한없이 따스하고 끝없이 절망적이고 끝없이 희망적인 것.
온 생의 고갱이들이 담겨있는 삶의 정수, 그 발 아래 엎드려 눈물 흘리는 마음으로 읽었다. 이 시집을 읽는 행위는 내게 있어서 시와 화해하는 악수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비록 시에 내 모든 걸 다 바치지 못해도 여전히 시는 나를 사랑한다는 것. 이제 그냥 그 품에 안겨 맛보고 즐기기만 해도 편안하리라는 것. 남은 생은 시의 품속에서 한가로이 놀아보고 싶다.
술패랭이 꽃
네 개의 꽃잎들은
어쨌든
아슴한 부채를 펼쳐들고
양지를 찬양하는 것이었다
한 평생 놀아버리자
이번 생은 아주 제껴버리자
아빠, 저기로도 가보자
아직도 어린 딸내미가
그의 소매를 잡아 채 이끄는 것이었다
이윤학
문득 20대 때 썼던 짧은 자작시가 떠오른다
손금
접어 보고
펼쳐 보아도
팍팍한 산길
내 유랑의 대동여지도
그때의 산길이 이미지로 그려낸 것이었다면, 이제는 온 몸과 가슴으로 삶은 가도가도 팍팍한 산길임을 안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가야하며 때때로 그늘도 시원한 물도 기다리고 있음도 안다.
이제 시는 가 닿아야할 높은 목표가 아니라
어루만져주고 쉬게 해주는 부드러운 손길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까지 물드는
저물녘 바닷가 붉디붉은 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