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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 - 태어남의 불행에 대해
에밀 시오랑 지음, 전성자 옮김 / 챕터하우스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현재의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죽음보다는 낫다라는 뜻으로 흔히들 하는 말이다. 삶이 얼마나 비루하고 고달프면 더럽고 냄새나는 똥밭 그것도 개똥밭에 비유를 했을까. 그래도 이승이 낫다니 삶에 대한 인간들의 강한 긍정과 의지와 욕망을 엿볼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또 누구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삶은 고해(苦海)와 같다.'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매일 매일 힘겨운 순간들이 반복해서 들이닥칠 때면, 우리는 속절없이 무릎이 꺾이며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되고, 사방을 둘러봐도 등대 하나 보이지 않는 고통의 망망대해에 홀로 난파된 듯한 뼈를 깎는 고독을 맛보게 된다.
그런데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삶의 출발점인 태어남 자체가 인간의 진정한 불행이며 재앙이라는, 충격적인 삶의 해석을 시도한 철학자가 있다. 루마니아 태생의 허무주의 철학자 수필가 에밀 시오랑은 조국이 헝가리 속국이 되는 것에 저항하여 모국어를 버리고, 자신이 평생 사유한 정신의 궤적을 아름다운 프랑스어로 옮김으로써, 사르트르 이후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추앙받았다.
끝없는 불면증과 자살의 유혹에 시달리며 생을 마감할 때까지 문단과의 교류도 방송출연도 수상도 거부한 채 철저한 고독 속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천착하고 고뇌했던 시오랑. 그 불면의 밤의 결과물들을 직관과 감성의 언어로 꿰어 주옥 같은 문장으로 엮어낸 빛나는 아포리즘.
처음에는 주제부터 마음을 묵직하게 짓눌러 쉽게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 책이다. 주로 짧은 아포리즘이 대부분이므로 그 속에 담긴 의미와 깊이를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조금씩 읽어갈수록 격조있고 아름다운 문체에 매료되었고 불교사상에 바탕을 둔 책 전체를 관통하는, 시오랑의 끈질긴 삶의 비극에 대한 탐구정신에 존경심마저 들었다.
꼭 첫 장부터 차례대로 읽지 않아도 좋다. 어떤 페이지, 어떤 문장을 먼저 읽어도 삶의 공허함이 목까지 출렁거리고, 이 허무한 삶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시오랑은 끊임없이 유혹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하십니까?'
'내 자신을 견딥니다.'
'괴로움이 극에 달할 때까지 괴로워해야 한다. 괴로움이라는 것을 믿지 않게 될 때까지.'
'어디에서도 현실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는다. 현실이 비현실적이라는 나의 느낌을 제외한다면.'
'태어남이 하나의 파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인정할 때, 삶은 마침내 견딜 만한 것이 되고, 마치 항복한 다음 날처럼 투항한 자의 홀가분함과 편한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탄생부터 죽는 순간까지의 삶을 비극적인 불행으로 노래한 시오랑의 글에서 심한 거부감을 느끼든 허무의 독이 든 술을 들이켜든, 그것은 자신의 삶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하면 된다.
거부감을 느끼는 자는 충만한 의욕과 긍정의 자세로 삶을 더 열정적으로 사랑하라.
공허한 술잔의 독을 삼킨 자는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고 표현해준 시오랑의 글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공감하라.
어쨌든 우리는 태어났고, 언제인 지 모를 마지막 순간까지 온 힘을 다해 허우적대며 파도와 싸우고, 가라앉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헤엄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삶은 쉽게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뜨거운 감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