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
레이철 조이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누구나 떠나고 싶어한다. 도시의 문명 속으로든 오지의 자연 속으로든 자신의 일상을 탈출하고 싶어한다. 우리의 일상은 정착민의 안정이며 떠남은 유목민의 방랑이다. 우리 모두 방랑자가 되는 꿈을 꾼다. 그래서 떠남, 여행, 방랑, 순례 같은 단어들은 꿈과 자유와 서로 통한다.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가장 먼저 마음을 잡아끈 것은 '순례'라는 단어였다. 순례의 사전적 의미는 종교상의 성지를 참배하는 여행인데 옛친구를 찾아 떠나는 길이 순례가 될 수 있을까. 그렇게 이름 붙여도 괜찮은 걸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작가는 맨부커 상 후보라는 명성이 부끄럽지 않게 서정적이고 섬세한 문체와 물흐르듯 이어지는 문장으로 흡인력 있게 독자들을 끌어당긴다. 내 자신이 해럴드 프라이의 속으로 들어가 그가 가는 길을 동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고 마지막엔 눈물을 쏟았다.

 

 양조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하다 정년 퇴직해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해럴드는 아들과도 아내와도 소통과 교감이 없는 무미건조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고 있다. 그러던 그가 오래전 직장 동료였던 퀴니로부터 암에 걸렸다는 편지를 받고 그녀를 격려하고 과거를 속죄하기 위해 문득 떠나게 된 천 킬로미터의 도보 여행길 87일간의 여정.

 

 '그는 걷기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가 걸을 것임을 알았다.' (P43)

 '차에서 내려 발을 이용하면 땅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것이 보이게 될 지도 몰랐다.'(P62)

 '그들이 내부에서 감당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무게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때로는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는데도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노력의 외로움.'(P118)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도 그것으로 자신을 심판하지 않을 것이라고 앞으로 언젠가 그 이야기를 들이대며 자신에게 맞서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하고 있었다. 그는 우정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P180)

 '갈 수 있을 지 어쩔지도 모르면서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작은 기적이 아니면 뭐가 기적이겠어.'(P383)

 '마음을 열지 못하면 모르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진정 희망이란 없어.'(P390)

 

 해럴드는 걸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열었고 마침내 자신의 내면 속에 눌려있던 과거의 끈을 풀고 상처의 기억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 책은 해럴드가 걸어서 지나간 수많은 지역과 만난 사람들에 관한 기행문일 뿐만 아니라 마음의 길을 걸어간 내면의 여정을 기록한 길이기도 하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자신이 받았던 상처와 슬픔과 두려움과 증오들, 다 사라진 것 같았지만 사실은 영혼 깊숙히 억눌려 있었던 그 생채기들과 똑바로 대면하면서 그것들과 화해하고 치유해나가는 해럴드 만의 영혼의 순례길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사막을 건너는 낙타처럼 자신만의 고통의 짐을 등에 짊어지고 뚜벅뚜벅 인생의 길을 간다. 때로는 그 짐을 내려놓고 마음의 성지로 향하는 치유의 순례길을 떠나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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