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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강경수 지음 / 창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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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 뉴욕의 한 동물원에 있던 북극곰이 이상 행동을 보여 동물원 역사상 처음으로 항우울제를 처방받았다는 영문 기사를 본 적 있다.

그 북극곰은 결국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숨을 거두기까지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전시된 삶의 상처가 약으로 나을 리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북극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림책 ‘눈보라’는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던 북극곰의 뒷모습을 표지로 삼았다. 그 옆에는 북극곰 표지판 위에 붉은색 빗금이 쳐져 있다. 아이들과 이 책으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면, 아이들은 아마 표지를 보고 북극곰을 ‘무서운 동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표지의 배경은 으슥한 ‘쓰레기장’이고 규칙을 상징하는 표지판에 그려진 북극곰에는 X자가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림책을 열어보면 보이는 북극곰의 모습은 웅장하다. ‘하얗고 빛나는 털을 가진’ 그는 북극의 반짝이는 별들 아래 눈을 빛내며 서 있다. 그러나 어쩐지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보이는 북극곰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북극곰의 모습과는 다르다. 한 조각의 얼음을 위태롭게 밟은 채 앙상한 몸을 드러낸다. 북극곰이 마을로 내려갈 수밖에 없던 이유는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인 것이다. 전래동화에 나오는 호랑이가 ‘배가 고파서’ 내려온 것과, 북극곰이 ‘먹을 것이 없어서’ 마을로 내려온 것은 그 이유가 확연히 다르다. 아이들은 이 장면에서부터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오를 것이다.

쓰레기통을 뒤지던 북극곰이 사람들에게 쫓기고 난 후 몸에 흙을 바른 채 ‘판다’처럼 보이며 환대 받을 때, 이야기의 초반과는 확연히 달라진 사람들의 행동에서 이질감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행복해 보이는 북극곰의 표정은 이야기 끝까지 계속되길, 북극곰의 따듯한 식사가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길 바라지만, 이 그림책은 그런 우리의 소망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그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아야 한다. 북극곰이 오롯이 북극곰인 채로 사랑받아야 이야기는 진실 된 것이 되니까. 판다가 아닌 북극곰이 되어버려, 돈이 되지 않는 동물에게 사람들은 이전의 따듯한 손길 대신 손가락질을 하며 돌을 던진다.

사냥꾼이 도망치는 북극곰의 뒷모습에 총을 쏘고 ‘영원히’라는 글자가 입김처럼 이야기 속에서 흩어져 버리고 난 후에야 그림책은 끝난다.


이 그림책을 함께 읽은 아이들이 북극곰에 관심을 가지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이들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나오길 간절히 바라며 읽게 된 그림책이었다.

지난 2011년, 서울동물원의 ‘최고 몸값’이었던 고릴라 '고리롱'이 숨을 거두고 난 후, 한동안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댓글이 있다. 짧은 댓글이지만 ‘고리롱’의 삶을 다시 한번 회고하게 해주는 좋은 글이다. 환경보호가 토픽으로 떠오른 시대다. ‘(죽음까지도) 전시된 삶’은 가능한지, 가능하지 않다면 우리는 무엇을 실천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고향 떠나온 지 반백년

시멘트 독에 절단된 발가락

휘청이는 몸으로

사랑도 힘에 부치어

자식 하나 남김 없음이 서러운데

본전 생각에 박제라니

하지 말아라

그만하면 됐다

아프게 가죽 벗겨

목마르게 말리지 말아라

먼지 앉고 곰팡이 필

구경거리로 세워놓고

애도니, 넋이니

그거 말장난이다

사라 바트만처럼

사무치게 그리웠을

아프리카

흙으로

하얀 북극곰 눈보라는 눈보라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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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밖의 모든 말들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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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쪽으로 더 안 쪽으로. 걸어가다가 보면 바깥으로 향한다는 걸. 사랑 바깥에서 우리는 언제든 자유롭고 외로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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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그날 - 6.10민주항쟁 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
유승하 지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 창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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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이면 밖을 서성이게 된다. 사방이 밝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월의 낮은 나무들의 그림자가 계속, 계속 보고 싶을 만큼 아름답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면 나뭇잎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가끔 세상을 잊게 만든다.

그런 낮이 길어지는 여름, 표준의 정시를 한 시간 앞당기는 ‘서머타임’. 그 시간에 일어난 세상의 혁명이 있다. 군사적 독재 정치를 저지하기 위해 일어난 ‘6월 민주 항쟁’이 그것이다. 창비의 신간 ‘1987 그날’은 그 시기를 다룬 만화다.


‘아파하면서 살아갈 용기가 없는 자 부끄럽게 죽을 것.

이 땅의 없는 자, 억눌린 자, 더 이상 죄지음의 빚짐을 감당할 수 없다.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부끄럽다. 사랑하지 못했던 빚 갚음일 뿐이다.’

‘혜진’이 마지막으로 적어두고 세상을 떠난 이 편지가 책 속에서 발화했다.

그는 정권이 공권력을 앞세워 자행한 민주 항쟁 사건의 피해자다. 당시 투항하던 여성들을 향한 고문은 남성에게 행해진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행되었다. 1986년 '성남 경찰서 장미경 사건' '부천 경찰서 성 고문 사건' 1987년 '파주 여자 종합고 성폭력 사건'등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성폭력 사건이 잇따라 벌어졌다. 수많은 피해자를 만들어낸 2996일간 독재하며 약 8년 동안 독주한 독재 정치를 막기 위해 시민들은 거리로 나왔다.


전국의 대학생들로부터 시작된 시위는 경적을 울리는 차들과 넥타이 부대들의 위로 휴지와 흰 손수건이 흩날렸다. 보태진 마음들을 거름으로 계층을 넘어 일어난 연대는 사회적 변화를 야기했다.

사람들은 경찰의 방패에 꽃을 꽂았고 여름을 맞은 카네이션은 방패의 한 가운데에 그렇게 뿌리내리듯 심어졌다. 1987년 6월의 그 시간들은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가 사람들에게 새겨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기까지. 너무나 많은 희생이 있었다.

여름이 세상을 잊게 해도 사람들은 세상을 기억해낸다. 성별과 나이, 지역과 빈부격차를 떠난 소란은 절대 깨지지 않을 것만 같던 벽을 부쉈다.

그때 사람들은 방패에 꽃을 꽂았고 지금 여기, 이곳의 사람들은 촛불을 든다.

촛불 같은 파도가 반짝거리며 윤슬을 내비칠 때, 거기 뿌려졌을 넋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 언제나 ‘되살아오는 유월에*’.

노래를 찾는 사람들 ‘유월의 노래’ 가사 중

봄이 왔다. 눈이 녹은 곳에 새살처럼 잎이 나고, 세상은 빈틈없이 환해졌다. 누추한 구석도 새잎 가득한 꽃대궐.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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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홍시뿐이야 - 제12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김설원 지음 / 창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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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안정적인 도형은 사각형이다. 사각형은 네 변의 길이가 정해졌어도 얼마든지 변형이 가능하고 변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모양은 무한하게 바뀐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도형은 삼각형이다. 세 변의 길이가 결정되면 한 가지 모양으로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삼각형에는 변수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도형은 나선이다. 귓속의 달팽이관, DNA의 분자 구조, 바다의 소용돌이, 목성의 폭풍, 은하의 소용돌이…… 기이하고 거대한 형상의 모습이었다가도 일순 모습을 바꾸는 나선은 가장 숭고한 도형이다.

여기, 언젠가 사각형이든 삼각형이든 잠깐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흐릿한 나선인 채로 살아가던. 그 와중에 맞은편의 점 하나가 불현듯 떠나버려 덜렁, 꼭짓점이 된 ‘아란’이 있다. 세상은 너무 완벽해서, 떨어져 나온 꼭짓점을 받아줄 품이 없다. 떠나버린 엄마와 ‘또 와 아저씨’의 파산 선고에 점 같은 짐짝이 된 아란은 세상 바깥의 가장자리로 내몰린다.


내몰리기 전, 아란이 나선이었을 때. 맞은편에는 ‘엄마’가 있었다. 시장의 조악한 짝퉁들을 구경하고 매운 잡채나 함께 먹던. 굳이 휴대폰을 놔두고 생활정보 신문에 일일이 빨갛게 동그라미를 치던. 어쨌든 아란은 그런 엄마를 의지하며 살았고 그래서 ‘당분간만 너는 나대로 나는 나대로 살자’는 엄마의 약속은 몸은 다 컸지만 열아홉 인 아란을 ‘나 정말 다 컸다, 내가 아르바이트할게.’라고 다짐하게 하던 것이었다.

아란의 부탁에도 엄마는 떠나고 곧 아란도 떠난다. 채권을 담보로 엄마가 아란을 맡겼던 ‘또 와 아저씨’가족은 식은 치킨을 앞에 두고 내린 파산 선고를 끝으로 단숨에 흩어진다. 아란은 계속해서 홍시 생각을 한다. 무슨 영양제도 아닌데 족족 엄마 입으로 들어가던 벌겋게 익은 홍시를. 찜질방에서 자다가도 단칸방을 구두계약하다가도 치킨집에서 배달 갈 코카콜라를 챙기던 와중에도 불쑥 떠오르는 홍시와 엄마 생각은 처치 곤란한 ‘한숨 덩어리(본문 93페이지)’같다.

복수하듯 아란은 엄마에게 백통이 넘는 문자를 보낸다. 저주를 퍼붓다 일기를 쓰다 이내 23번 버스의 종점에 내가 있다는 신호를 보낸다. 그건 미약하지만 선명한 구조 신호 같아서 아란은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휴대폰을 든다. 문자를 읽든 읽지 않았든 어디론가 닿을 문자는 가볍게 수신인을 찾아간다.

군산은 바닷가 근처라 그 문자가 알아서 막힘없이 잘 가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든다. 아란이 살고 있는 곳은 군산이다.

공장이 허물어진 작은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남은’사람들이다. 죽음으로부터 남겨진, 있든 없든 개의치 않는 나머지,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그러나 여전히 그곳에서 뜨거운 기름에 닭은 튀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따금 가게 문을 매몰차게 닫고 떠나야 할 정도로 찌든 내에 진절머리를 내면서도 ‘콩나물 많이 넣은 아귀찜’을 해준다는. 그렇게 남도 가족도 아닌 사람의 손을 잡고 이끄는.

아란은 여전히 엄마에게 저주를 퍼붓다가도 홍시를 사서 머리맡에 둔다. 달고 붉은 홍시가 물러터질 때까지. 그렇게 백 개, 이백 개 쌓일 때까지. 그걸 쳐다보다 나간 가게에 매일 같이 얼굴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군산에서 대천 바다까지는 많이 멀지 않다. 오늘 같이 가자(본문 210페이지)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간다. 그게 복수의 전부여도 괜찮을 것이다.


* '나선'에 대한 언급 부분은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도형, 나선> 도서를 참고하였음

"이제 시작인데 여행지에서 막 돌아온 기분이야. 십분만 누워 있다가 출발해야지. 오늘 같이 갈 거지?"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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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 창비시선 439
이영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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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재 '#나는되어가는기분이다'


그는 길 위에 있다.

‘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

도중(道中)에 내뱉는 뜬금없는 고해는 천박한 희망으로도 처절한 애씀으로도 보인다.

그를 허무주의자라고 ‘옹호하자는 건 아니다(*내가 알던 A의 기쁨)’.

오히려 그는 ‘낭만의 우아하고 폭력적인’, 바로 그것에 관하여 끊임없이 장면을 순환시킨다. 그건 이미 과거를 지나쳐와 ‘아름다운 시대’를 무턱대고 입에 올리는 사람들의 허황처럼 보이고 ‘야금야금 뜯어먹히’다 노을을 보고 꼬리를 흔드는 들개들의 천진함처럼 보인다. 그는 정확히 알고 있다. ‘그 어떤 사랑보다 편협할, 우리가 시작하는 힘으로 가할 폭력적인 사랑의’낭만을 말이다. 맺지 않고 끝나는 낭만은 일각을 다투다 뻔뻔하게 사라지는 허상이다.

길 위에서 보이는 게. 그게 다여서. 오로지 작위만이 “깨끗하고 매끄럽다(*미지)”. 원래부터 없던 것처럼 ‘조용하고 깨끗한, 그리울 수 없는’ 이별 마냥 있다. ‘뭐,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다(*암묵)’. 이렇게 그는 순순히 허무주의에 갇히는 것 같은데. 이상하다.

이런 와중에도 내가 부여하는 원인과 핑계는 ‘실패마저 되’고 ‘사랑마저 되’고 만다.

‘되’고 있거나 ‘되어’가거나 ‘되’었다가 ‘되’지 않음으로 시는 연민하는 허무주의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허무의 바깥으로 걸어 나온다. 아니 이미 나는 알 수 없게, 시는 허무와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허무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고’ 보는 그는 그의 말대로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는 듯하다. (강조하지만, 반대가 아니다) 이쪽에서 걸어 나와 저쪽으로 가도 그는 안도하지 않는다. 언제든 내가 걸어온 이쪽도 지금보다 더 ‘아니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허무가 ‘될 리 없고’ ‘될 수 없고’ ‘아니’라고 말한다. 시인은 이를 반복하며 그가 알고 있는 것을 끊임없이 알려 하고 언어를 통해 감각해낸다.

시 안에서 착종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운명은 운명 아닌 것이 되어 다른 무엇도 종속하지 않고 그저 ‘환하고 더디’다고, 이건 통조림이고 이것은 방이라고 말한다. 그 안에 ‘남아있는 것’이라곤 목적이 되지 못한 ‘오브제’뿐이다.

뭐.

그러나 조금의 허상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따져 오는 그가 있다. 살아있다는 감상에 빠지려는 때 시는 한순간 몸을 돌린다. 이곳도 아니라는 것 같다.

외면일 뿐이잖아.

측면일 수도 있어.

외면일 뿐이잖아.

정면에 뭐라도 있을 것 같아? (*이 사과는 없다)

절대로 아무것도 미워하고 싶지도, 믿지도 않겠다는 듯 단호한 태도는 ‘반대편은 반대편으로 인해 증명되는 반대편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나의 옹졸도 여태의 결연일지 몰라서’라는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어쩌면 이미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지 모른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약속을 저버리는 것이 운명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모르는 것이다.

모르는 채로 길 위에서 걸었다면 길 아래로도 걷는다.

길 위에 환상으로나마 남아있던 허상은 길 아래에 선 지금 더 이상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 이 무심함은 이상하고 익숙하다.



교묘한 지점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우리는 교묘한 약속이어도, 된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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