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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벙 다음은 파도 ㅣ 창비시선 523
오산하 지음 / 창비 / 2025년 9월
평점 :
오산하의 첫 시집 첨벙 다음은 파도는 재난과 종말의 이미지를 통해 오히려 지금 여기의 삶을 또렷하게 비추는 시집이다. 이 시집에서 종말은 끝이 아니라 감각의 출발점이며, 죽음은 삶을 밀어 올리는 또 하나의 힘으로 작동한다.
전쟁, 기후위기, 사고와 파멸 같은 장면들이 반복되지만 시는 결코 비관에 머무르지 않는다. 첨벙 다음은 파도 라는 문장처럼, 세계는 계속 움직이고 질문은 남는다. 오산하는 냉소 대신 유머와 리듬을 택하고, 절망 대신 언어를 붙잡는다. 야광 인간, 잠수부, 빈 병 같은 기묘한 이미지들은 일상의 불안을 낯설게 변주하며 우리가 이미 재난의 시대 한복판에 서 있음을 자각하게 한다. 특히 “서로를 바깥으로 꺼내면서 걷자”는 반복되는 제안은 이 시집의 핵심 정서로, 무너진 세계에서도 연대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첨벙 다음은 파도는 종말을 노래하면서도 끝내 삶을 선택하는, 기쁘게 망가진 세계의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