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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한국사 고난을 극복한 인물 ㅣ Why? 한국사 36
윤상석 지음, 정석호 그림, 문철영 감수 / 예림당 / 201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풍족한 삶을 살고 있는 요즈음 아이들에게 자신의 핸디캡을 극복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닐거에요. 스포츠에서조차 헝그리 정신이 없었졌다고 말하는 시대입니다. 우리 역사속에서 신체, 신분 등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자신의 꿈을 펼치고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을 접할수 있는 기회가 되어 아이들과 뜻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요. 평소 잘 알고 있는 위인들이 아니지만 그들을 만나보고 아직까지 그들에 대하여 알지 못했던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어떤 핸디캡이 있었고 어떻게 이겨나갔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해요.

고난을 극복한 역사 인물들을 수호하는 요정인 인동이와 미소, 천지, 다리를 다쳐 축구를 하지 못한다고 투덜거리는 마루와 함께 고난과 역경을 슬기롭게 극복한 우리 조상들을 만나보도록 해요.

어머니의 병이 차도가 없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약으로 써서 낫게하고 절뚝박이가 되어버린 황대중은 뛰어난 무예 실력으로 호위군에 뽑혀 선조의 피난길을 지키고, 진주성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가 턱없이 부족한 군사력에도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안타깝게 대패합니다. 이순신 장군을 찾아가 부상을 당하면서도 전투에 임한 그는 과거의 효건에 이어 충건의 칭송를 듣고 양건으로 불리우게 되지요. 1597년 병마절도사 이복남 장군을 도와 남원성을 지키려고 애썼으나 목숨을 잃게 되고 주인의 장례 기간 내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슬퍼한 말과 함께 묻히게 됩니다.

황희석의 가인이었던 박자청은 1392년에 정5품 무관직인 중랑장에 임명되고 이듬해 정4품 호군에 올라 태조의 경호를 맡아 깊은 총애를 받았고 조선이 세워진 뒤 여러 공사를 담당한 판내시부사 김사행을 도우며 건축 일을 배워 건축에 남다른 재주를 발휘하며 경복궁을 비롯한 도성 곳곳의 토목 공사를 담당하는 선공감 소감으로 실력 발휘를 합니다. 1395년 그동안의 공을 인정받아 원종공신에 오르고 태종때 창덕궁 공사를 감독하고, 1407년 성균관 문묘 공사를 감독하였으며, 1408년 모화루의 연못 공사, 1412년 경복궁에 연못을 만들어 물을 채우고 경회루를 지었어요. 1419년 인정전 공사에서 상왕인 태종의 뜻을 따르지 않아 옥에 갇히고 벼슬도 뺏겼지만 이듬해 상왕 태종의 명을 받들어 살곶이에 다리를 놓는 등 여러 공사를 감독합니다. 태종이 죽은후 원경 왕후의 능 옆에 태종의 능을 짓는 일을 맡았어요. 그는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능력을 인정받아 1품 벼슬에 오른 조선 제일의 건축가였습니다.

어려서부터 몸이 여위어 어깨와 등이 굽는 장애가 있던 경암 허조는 검소하고 청렴함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었어요. 예법에 밝았고 옳다고 여기면 뜻을 굽히지 않는 강직함으로 태종의 눈 밖에 나기도 했어요. 하지만 임금 앞에서도 할 말 다 하는 그가 누구의 청탁도 들어주지 않을거라고 판단한 태종은 허조에게 이조 정랑을 제수합니다. 1422년 이조 판서에 임명된 허조는 불합리한 법을 고쳐 억울한 백성이 없도록 하기 위해 세종의 명을 받아 육전을 바로잡았고, 능력 있는 인재가 조정에서 제 역할을 다하길 바라며 책임지고 자기 일을 하다가 꾸지람을 듣는 관리가 있으면 앞장서서 감싸주었어요. 죽음을 앞두고도 끝까지 나라 걱정을 한 허조는 기록에 척추 장애에 대한 내용이 별로 없을 정도로 그의 장애는 재능을 펼치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요.

청풍 군수 이고의 외동딸로 태어난 고성 이씨 부인은 어여쁘고 정숙하여 주변에서 큰 사랑을 받았지만 어릴 때 시력을 잃었어요. 대학자인 퇴계 이황의 제자 서해와 부부가 되었으나 결혼한 지 3년만에 남편 서해가 세상을 떠나고 홀로 외아들 서성을 키워 종1품 판중추부사에 이르게 하였으며 자신도 1615년에 정경부인에 추증되었어요. 조선의 명문가 대구 서씨 가문의 전성기를 주도한 그녀는 남녀 차별이 심한 조선 사회에서 어느 남성 못지않게 훌륭히 가문을 번성시켰고 눈이 멀었다는 신체 장애까지 넘어선 뛰어난 분이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릴적 곳곳의 이름난 의원을 찾아다니며 침술을 갈고 닦은 허임은 임진왜란 무렵에 본격적으로 의원을 열고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했어요. 침의로 이름을 알리자, 분조를 이끌던 세자 광해군이 그를 도울 것을 명합니다. 광해군을 따라다니며 아픈 병사와 백성들을 정성껏 치료한 허임은 1595년 치종교수로 활약하고 선조를 치료한 공을 인정받아 당상관에 오르지요. 광해군때 경기도 마전 군수에 임명되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벼슬을 내려놓고 전라도 나주로 내려오고, 광해군의 줄기찬 부름에 다시 한성으로 돌아가지요. 조정에서 물러나 충남 공주에 정착해 제자 양성에 힘쓰던 중 늙고 쇠약해져 침을 놓기 어렵게 되자 후세에 도움이 될 책을 쓰기로 하고 1644년 오랜 경험을 토대로 침술서인 <<침구경험방>>을 편찬합니다. 당시 내의원 제조였던 이경석이 허임의 침술은 죽은 사람도 살리는 신의 의술이라고 평가하는 등 태어날 때는 낮은 신분이었지만 오로지 스스로의 능력으로 성공하였어요.

천민이지만 양반들도 힘들어하는 시묘살이를 하였던 유희경은 동강 남언경의 제자가 되어 예학을 배우게 됩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당대에 손꼽히는 상례 전문가로 이름을 알리게 되고 양반 사대부의 상례 절차 뿐만아니라 국상 절차까지 살피는 실력을 발휘하지요. 또한 박순이란 스승을 통해 시재를 꽃피워 자신처럼 천민 출신이지만 시문에 능한 백대붕 등과 자주 어울리며 '풍월향도'라는 시회를 이끌고 여류 시인 매창과 사랑을 키워나갑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는 등 왜적을 물리치는데 앞장서 면천하게 되고 장례 전문가이자 시인으로 활약하며 양반 관리들과 자주 어울리고 인정을 받은 덕에 호조의 재원을 해결한 공으로 통정대부의 품계를 사대부들의 반대없이 받게 됩니다.
이이첨의 무리가 유희경을 잡아다가 인목 대비를 모함하는 상소를 강요하며 여러 달 가두었으나 뜻을 꺾지 않았고 인조는 그 뜻을 높이 사서 종2품 가선대부의 품계를 내려 주었어요. 그는 천민으로 태어났지만 늙어서는 어느 양반 못지 않은 명예와 지위를 누리셨어요.

평생 글공부만 하던 김운란은 갑작스럽게 앞을 못보게 되자 좌절하게 됩니다. 선비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며 방황하던 중 아름다운 아쟁 소리에 이끌려 아쟁을 연주해 보고 싶은 생각에 가르침을 받게 되지요. 귀신까지 감동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그의 연주는 많은 이들이 칭찬을 합니다. 율곡 이이, 허균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 그의 솜씨를 인정했어요. 갑작스런 장애로 좌절을 겪었지만 주저앉지 않고 아쟁 연주가로서 새 삶을 개척한 김운란의 용기는 큰 감동을 줍니다.

세종때 장영실이 있었다면 숙종과 영조때는 최선약이 있었어요. 예술가를 후원한 서평군의 눈에 띄게 된 최선약은 영조에게까지 그의 손재주가 알려지게 되지요. 자명종을 고치고 자명종을 직접 만들기도 하고 왕실 옥보와 옥인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영조는 그의 공을 인정해 무관 벼슬을 내리게 되고 1730년 서평군의 청나라 사행길에 따라가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두루 살펴보며, 벽돌, 기와 같은 실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방법을 배워옵니다. 이듬해 인조의 무덤인 장릉을 옮길때 석물을 조각했으며, 그 뒤로도 꾸준히 왕실의 무덤을 만드는데 힘을 보탭니다. 종3품 첨사 벼슬을 받은 최천약은 도량형의 새 기준이 된 경신척을 만들고, 악기 만드는 일을 총감독하며 편경과 편종도 완성하고, 침술 연습에 필요한 동인을 만들고, 무기 개발, 왕실 무덤인 의령원과 소령원 공사에도 힘을 다하지요. 하지만 낮은 신분 탓에 줄곧 시기와 모함에 시달려야 했어요.

15년간 기하원본을 읽으며 공부한 김영은 관상감 제조 서호수 대감에게 실력을 인정받고 영의정 홍낙성의 집에 드나들며 손자 홍길주에게 산학을 가르칩니다. 1789년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 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려 할 때, 시각을 정하는 일에 문제가 생기자 영의정 김익의 추천으로 중성의 위치를 계산하는 일을 맡게 되고 천체 관측기구인 적도경위의, 지평일구 등을 만들고, 24절기마다 바뀌는 중성의 위치를 자세히 기록한 <<신법중성기>>란 책을 씁니다. 김영의 공을 높이 사 특별히 정조는 관상감에 뽑아 쓰려고 하지만 관리들은 반대를 하고 반대를 물리치고 관상감 역관에 그를 임명합니다. 김영은 그 뒤 종6품까지 벼슬이 올랐으나 자신을 응원해 주던 정조와 서호수가 세상을 떠나자, 벼슬자리에서 쫓겨나지요. 순조의 부름에 다시 관상감에 돌아가 혜성의 운행 도수를 비롯해 다양한 천체 문제를 풀어 나가지만 재주를 시기하는 소인배들의 핍박에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세상을 피해 숨어 살기로 결정합니다. 서호수 대감의 큰아들 서유본의 권유에 따라 수학에서 출발해 천문학, 주역, 음악, 서양의 자연 과학까지 평생 연구한 학문을 총정리하던 중 뜻을 이루기 전에 세상을 떠나게 되고 그동안의 연구 자료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높은 신분의 벽에 부딪쳐 제대로 능력을 평가받지 못했지만 낮은 신분에 절망하지 않고 평생을 학문 연구에 몸 바친 그의 열정은 꼬옥 기억해야겠어요.

어릴 때 다리를 저는 장애를 얻은 이이엄 장혼은 조선 출판의 황금기인 정조 때 큰 역할을 했어요. 중인은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므로 서당에 가지 못하게 한 아버지의 반대에도 어머니로부터 글을 배워 훈장을 하며 먹고 살았어요. 20년 넘게 사준으로 활약하며 정조뿐 아니라 많은 양반이 책을 만들때 도움을 주었고 출판 전문가로 거듭나게 되지요. 또한, 시사를 만들어 공동 시집을 펴내고, 시경연 대회를 여는 등 스스로의 생각을 표현하고 신분제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천수경과 함께 송석원 시사를 이끌어 위항 문학의 발전에 큰 역할도 했어요. 위항 시집인 <<풍요속선>>, 아동 교육서인 <<아희원람>>, 어린아이의 어휘력과 지식을 넓혀 주기 위해 만든 백과사전 형식의 책인 <<몽유편>>을 만들었어요. 책의 인쇄 비용을 줄이기 위해 목활자인 이이엄자를 직접 만들어 예전보다 책을 많이 인쇄할 수 있었어요. 장혼은 평생 어린이 교육에 관심을 기울여 흔히 한국의 페스탈로치라고 불리웁니다. 장혼이 만든 계몽편이란 어린이 책은 일제 강점기에도 꾸준히 인쇄될 만큼 아동 교육에 큰 영향을 끼쳤어요.

역사상식 1-3에서는 책에서 언급되지 않은 다양한 고난을 극복한 인물을 소개합니다.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신라 최고의 영웅으로 거듭난 김유신, 공주와 결혼한 평민 장군 온달, 왕을 꿈꾼 천민 이의민.
장애를 딛고 재상이 된 앉은뱅이 정승 심희수, 귀머거리 재상 이덕수.
재주를 꽃피운 여성 예술가로 시를 사랑한 영수합 서씨, 최초의 여성 판소리 명창 진채선.
모두 신분, 신체, 성별의 차별을 극복하고 자신의 꿈을 이룬 인물들이네요.

책 뒷편엔 알맹이 문제풀이와 정답이 있어요.
책과 함께 살펴본 10명의 인물들의 이야기를 상기해보면서 차근차근 확인해보고, 꼼꼼히 풀어보도록 해요. 정답이 틀리거나 생각이 나지 않아 문제를 풀지 못했다면 다시 한번 본문을 읽어보도록 해요.
훌륭한 업적으로만 평가되는 위인들의 삶에도 어린시절부터 이겨낸 갖은 고난과 시련이 있겠지만 역사 속 신체 장애, 성별, 신분 같은 자신만의 힘으로는 이겨내기 힘든 역경과 고난을 슬기롭게 극복한 위인들을 살펴보면서 우리 아이도 그들의 용기와 지혜를 본받아 앞으로 마주하게 될 어려움속에서도 용기를 잊지 않고 꿋꿋이 이겨내어 자신이 원하는 꿈을 이루어 나가길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