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와 정원사 - 어느 괴짜 예술가의 치유하는 정원 그리고 인생 이야기
마크 헤이머 지음, 황재준 옮김 / 산현글방(산현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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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소설이라 생각했는데 다 읽고 나니 에세이다. 그간 전형적인 스타일의 에세이를 주로 읽었던 내게 이 책은 총 309면의 분량임에도 그 두 배쯤 되는 서사처럼 느껴져 평소 같으면 하루 반나절이면 다 읽었을 책을 무려 일주일이나 붙들고 있었다. 책날개에서 이미 이 책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었는데, 평소와는 달리 본문부터 읽기 시작했던 탓이다.

 

책날개에서 화가이자 작가, 정원사인 '마크 헤이머'가 쓴 이 책은 "어린 시절부터 노년까지 이어진 자연과의 교감, 그리고 정원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치유력에 관한 지혜 넘치는 회고록"이라 설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시절의 저자 자신일지 모를 소년을 '봄비', 아버지에 대해서는 '미친개'라 표현하고 있고, 현재의 자신을 '정원사'로 설정하여 독자로 하여금 소설로 착각하게 만든다.

1인칭 시점의 전형적 에세이 형식을 탈피하여 자칫 '정원사의 일기'로 전락하는 것을 막았다.

저자는 개미나 민달팽이 같은 생물과 꽃, 나무 같은 식물을 통해 인간 사회의 여러 현상이나 인간의 감정을 빗대어 설명한다. 개미 군집을 통해 권력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난세(亂世)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권력은 이성적이고 이해력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대부분 이기적이고 다른 사람의 사정에 무감각하며, 억압과 착취를 통해서 획득되고 유지된다. 조용하고 더 희소하고 더 위엄 있는 약간 성격이 다른 권력도 있지만, 그런 권력은 대개 잘 드러나지 않고 잔인한 소음 속에 숨어 있으며 조용함과 평온함으로 가득차 있다. 소년은 그런 성격의 권력을 느낄 수 있고, 그것이 실제로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고, 본인의 몸속에서 그것을 직접 느낀다. 하지만 아직 권력이 어떤 것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본문 pp.138-139

또한 아버지에게 '쓰잘머리 없는 똥 덩어리'라는 언어 폭력을 당한 후 느낀 분노와 슬픔과 고독을 탁상 위의 과꽃, 미나리아재비, 보라색 붓꽃이 꽂힌 화병을 보며, 꽃이 시드는 것을 삶의 덧없음에 비유한다. "우리가 모든 것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란 가치에 대한 개인적인 판단이다. 내 머릿속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이명이 새들의 노래에 비해 더 자연스럽거나 덜 자연스럽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내가 그것에 부여하는 것 이상의 가치는 지니고 있지 않다."라고.(본문 p.213 참조)


 

 

이어서 저자는 "모든 것에는 결점이 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주가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돌연변이와 기이함은 무언가를 실제로 생겨나게 하거나 움직이게 하는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완벽함이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고 마음속에만 있는 하나의 관념일 뿐이다. 우주에 직선은 없고, 심지어 행성들도 완전한 구형은 아니며, 중력과 시간도 장소에 따라 바뀌고 움직인다. 만약 무언가가 잘 작동한다면 흠결 있고 불완전한 채로 작동한 것이다."(본문 pp.214-215 참조)라고 자신의 결점을 지적한 아버지에게 논리적으로 반박하듯,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풀어놓는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사춘기 청소년 아들을 양육중인 나도 저자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들었다는 정도의 막말을 아이에게 수시로 해대곤 했는데, 이렇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넘어 인간의 불완전한 속성까지 고민할 정도로 심각한 상처가 되는 말이었다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팠다. 우리 아이도 외동이라 그런지 쉽게 상처 받고 외로움도 많이 타는데 그런 아이에게 친구이자 세상 유일하게 기댈 존재인 부모가 자신의 쓸모를 부정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쏟아냈으니 그 상처가 오죽했을까. 앞으로는 조심 또 조심해야겠다.

그러나 한편으로 '저자가 어릴적 아버지로부터 당한 가정폭력의 시련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철학적 사유를 하게 되었을까' 라는 억지스런 생각도 들었다. 인생에서 어느 정도의 결핍은 인간이 올바르게 성장하기 위한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나는 어렸을 때의 지독한 가난이 일찍 철들게 했고, 우리 아이가 소위 사춘기의 특권인 양 반항하는 언행 따위는 감히 흉내도 한 번 못내 봤다. 사춘기는 내게 사치였다. 어떻게든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안정된 직장을 잡아야' 했다. 물론 인생은 내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 주지 않았고, 돌고 돌아 이렇게 서평 글쓰기로 시작하여 브런치 작가로서 열심히 활동중이다. 그럼에도 부모라는 지위를 권력처럼 아이에게 군림하기 위해 함부로 이용해서는 안되겠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굳이 인격 말살 수준의 비하 발언으로 상처를 입혀가며 극복하길 바라는 것은 독재자들의 사상과 다를 바 없으니.

지금도 말과 행동으로 상처 주고, 물리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나 그로 인해 고통받은 자들은 꼭 한번 이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표지에서부터 숲을 느낄 수 있고, 특히 저자의 어린 시절을 짐작케하는 뒤표지 집 앞 구석에서 책을 보는 소년을 보면서 내 아이를 떠올려 보시라. 아버지한테 온갖 비난 등 가정 폭력으로 상처입은 영혼이 정원의 개미들과 민달팽이, 쥐며느리, 딱정벌레를 보며 분노와 슬픔을 삭이는 아이, 혼자 정원에서 책을 보는 아이, 안쓰럽지 않은가. '누구에게든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을 꼭 기억하자! 세상에 맞아도 싼 사람은 없다.

본 서평은 산현재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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