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가설 중에서
생겨난 단 하나의 냉엄한 현실.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었기 때문에

살아지거나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삶.

우리의 오늘들은
그런 한번 뿐인
오늘들의 총합이
아니었을까..


내가 이 개인적인 글에서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은 딱 한 가지뿐이다. 딱 한 가지 당연한 사실이다.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 가령 그 한 방울이 어딘가에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가, 개체로서의 윤곽을 잃고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 사라져간다 해도.

아니,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가기 때문에 더욱이.

나는 지금도 때로 슈쿠가와 집의 마당에 서 있던 높은 소나무를 생각한다.

그 가지 위애서 백골이 되어가면서도, 사라지지 못한 기억처럼 아직도 거기에 단단히 매달려 있을지 모르는 새끼 고양이를 생각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저 먼 아래, 눈앞이 어질어질해지는 지상을 향해 수직으로 내려가는 어려움에 대해 생각한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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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오직 혼자인 존재.

언제나
우리는
혼자였다.

그래서
함께일 수 있었던 걸지도..

우리는 다르게 보고 듣고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말로 각자 다른 인지적 세계를 살고 있다.
 
그 다른 세계들이 어떻게 잠시나마 겹칠 수 있을까
겹그 세계 사이에 어떻게 접촉면 혹은 선이나 점, 공유되는 공간이 생겨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지난
몇 년간 소설을 쓰며 내가 고심해온 주제였다. 
그 세계들은 결코 완전히 포개어질 수 없고 공유될 수도 없다. 

우리는 광막한 우주 속을 영원토록 홀로 떠돈다.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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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우지 않고도
비울 수 있는 것

비우지 않고도
채울 수 있는 것

언제나 그러한 것
무엇일까..

모든 것이 그렇다네.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나쁘며 또 어떤 것은 무심하지.

좋은 것에는 미덕이 있어서 모두가 그것을 소유하려고 들지. 나쁜 것은 악덕이지만 이 또한 모두가 마음껏 즐기려 든다네.

무심은 이와 같은 미덕과 악덕 사이에 놓여 있네. 부와 빈곤, 건강과 질병, 삶과 죽음, 그리고 쾌락과 고통이 그 속에 있다네.

에픽테토스 대화록

얼마나 날씬해야 하는 것일까? 얼마나 돈이 많아야 하는 것일까?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야 하는 것일까?

타인이 속상해하는 것, 부러워하는 것, 광분하는 것, 소유하고 싶어서 탐욕을 내는 것들이 있는 곳에서 우리는 객관적이고 정숙한 태도로 냉철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세네카는 당대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했으며 명성 높은 인물이었지만 스토아 철학의 기조 그대로 이와 같은 것들에 무심했다.

그는 그 모든 것들이 언젠가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미칠 듯이 더 많은 것을 갈망하지도 않았고 조금이라도 없어질까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무심은 아주 단단한 절충적 관점이다. 무심은 회피도 아니고 기피도 아니며,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안에 있으면 진심으로 편안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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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거나
하지 않거나

어차피 후회한다면
해보라는 조언과 충고가
넘쳐 흐르는 시절

때로는
가만히 있는 것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헷갈려 하는 적도 많았지만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기로
열심히 마음 먹는 것 만으로도

주어진 생은
주어질 삶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한 달을 멈추어
열한 달을 나아갈 수 있는
생각의 힘 기를 수 있을 날도
또 하나의 여행이겠구나..

한 달 동안 나는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하려고 한다.

일을 하지 않을 것이고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골똘하게 생각을 한다거나
오래오래 관찰을 한다거나

나아가서
화장을 한다거나
새 옷을 한다거나

누군가를 만난다거나
누군가를 그리워한다거나
누군가를 미워한다거나

더 나아가서

헤아린다거나
상상한다거나
표현한다거나

자책한다거나
후회한다거나
뉘우친다거나

그런 것들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한 달 동안 나는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을
가장 열심히 하려고 한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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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우지 않고도
비울 수 있는 것

비우지 않고도
채울 수 있는 것

언제나 그러한 것
무엇일까..

모든 것이 그렇다네.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나쁘며 또 어떤 것은 무심하지.

좋은 것에는 미덕이 있어서 모두가 그것을 소유하려고 들지. 나쁜 것은 악덕이지만 이 또한 모두가 마음껏 즐기려 든다네.

무심은 이와 같은 미덕과 악덕 사이에 놓여 있네. 부와 빈곤, 건강과 질병, 삶과 죽음, 그리고 쾌락과 고통이 그 속에 있다네.

에픽테토스 대화록

얼마나 날씬해야 하는 것일까? 얼마나 돈이 많아야 하는 것일까?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야 하는 것일까?

타인이 속상해하는 것, 부러워하는 것, 광분하는 것, 소유하고 싶어서 탐욕을 내는 것들이 있는 곳에서 우리는 객관적이고 정숙한 태도로 냉철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세네카는 당대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했으며 명성 높은 인물이었지만 스토아 철학의 기조 그대로 이와 같은 것들에 무심했다.

그는 그 모든 것들이 언젠가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미칠 듯이 더 많은 것을 갈망하지도 않았고 조금이라도 없어질까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무심은 아주 단단한 절충적 관점이다. 무심은 회피도 아니고 기피도 아니며,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안에 있으면 진심으로 편안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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