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은
어디로 이어지는 것일까


차분한 차가움의 온도여
여정은 어디로 이어지는 것일까?
멈춤이래도
너는 멈추지 않을 수 있을까?
당신이 갔대도
당신은 당신이 있는 곳으로
어떻게 갈 수 있을까?
내 속의 내가 나는 아니라 할 적에
나는 나일 수 있을까?
사물이 사물 속으로 들어가듯
사물이 사물 속에서 나오듯
감동하지 않고
나는 이제 더 이상
헤아리지도 않는다. 9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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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 뛰거나 앞당기거나
옆으로 밀쳐낼 수 없는 끼니.

인생은 지금까지 먹고 마신
끼니로 이루어진게 아닐까.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다가올 단 한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새없이 밀어닥쳤다. 끼니를 건너뛰어 앞당길 수도 없었고 옆으로 밀쳐낼 수도 없었다. 끼니는 새로운 시간의, 밀물로 달려드는 것이어서 사람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었다. 먹든 굶든 간에, 다만 속수무책의 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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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적 개념의 순간들로
수직적 개념의 영원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무의미하다.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라
각각의 점들이
무수히 찍혀 있는 것이다.

오늘 하루
어떤 점을 찍어야 할 것인가
어떤 점을 찍지 말아야 할 것인가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이 희미함과 깊이 연결돼 있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의 정확한
미시적인 상태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고려할 수 있다면 시간의 흐름에 관한 
특징적인 부분들이 사라질까?

그렇다. 
사물의 미시적인 상태를 관찰하면, 
과거와 미래의 차이가 사라진다. 

예를 들어 이 세상의 미래는 
현재의 상태에 따라
즉 과거의 상태에서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현재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원인이 결과보다 앞선다는 
말을 자주하지만
사물의 기본 문법에서는 
‘원인과 ‘결과‘의 구분이 없다. 

그 대신 서로 다른 시간에서의 
사건들을 연결하는 물리 법칙들에 의해 
표현되는 규칙성이 있는데
여기서 미래와 과거는 서로 대칭적이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과거와 미래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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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깨어나지 않았다면
이 아침 이 책 펼치지 않았다면
이 아침 이 글 쓰지 않았다면

아니 오늘 아침 숨이 멎었다면
이 순간은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선물
present
현재
충분합니다.

언젠가 광고판 근처를 지나다가 인상적인 문구를 본 적이 있다. "장난감을 가장 많이 가진 채 죽은 사람도 단지 죽은 사람일 뿐이다." 죽음의 순간에 다가가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내가 야근을 얼마나 자주 했는지, 내가 투자한 펀드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를 떠올릴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것을 말이다. 대신 "만약 내가 그렇게 했더라면"같은 가정의 질문이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예를 들면 "만약 내가 항상 하고 싶어 했던 일을 하고 살았더라면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같은 질문 말이다. 28.p

내가 종일 열심히 일하는 것은 책 읽는 시간을 내기 위해서다. 훌륭한 소설이나 자서전, 차 한 잔, 몸을 푹 파묻고 앉을 수 있는 아늑한 공간만 있으면 천국이 따로 없다. 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 속에 사는 것이 정말로 좋다. 종이 위애서 살아나는 사람들과 만나서 느끼는 유대감은 나를 전율케 한다. 그들의 상황이 나와 크게 다르다 한들 대수랴. 나는 마치내가 그들을 정말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낄 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나 자신을 더 잘 파악하게 된다. 통찰력과 유용한 정보, 지식과 영감과 힘, 좋은 책은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덤도 얹어준다. 42~4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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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어진 생의 전쟁의 하루 마감하고
이 주어질 삶의 전쟁의 하루 시작하면서

개와 늑대의 시간을 넘어서
사각사각 거리며 다가오는
토요일의 밤.

적들의 노 젓는 소리 듣다.

난중알기의 메마른 문장 속에서는 춥고 배고파서 도망치는 부하들을 목베는 이순신의 마음의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이순신의 바다는 인간세의 고해다. 그는 그 고해를 끝까지 건너갔다.

- 삼가 무찌르고 붙잡은 일을 보고합니다.

라는 첫 문장으로 대뜸 시작한다. 나는 이 문장에서 그의 무인적 에토스를 느낀다. 그는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부하들의 이름과 공적을 모조리 적어서 임금에게 보냈다. 그들의 이름은 모두 기록에 남아 있다.

‘맞붙어 싸울 때 ‘관노비 기이, 관노비 난성, 토병 박고산, 격군 박궁산...들은 전사했고, 그 밖에 수많은 관노비, 사노비, 절에 딸린 노비, 내수사 노비, 어부, 격군, 토병 들은 부상당했는데, 이순신은 이들의 이름 석 자와 작은 전공까지 세세하게 적어서 임금에게 보냈다.

이순신은

- 이들의 처자식들에게는
구제를 위한 특전을 베풀어주소서.

라고 임금에게 청원했다.

그 엄혹한 신분제 사회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천민‘들의 이름을 적어서 임금에게 보내고 원호를 요청했다. 군율을 어긴 자들을 가차없이 목 베고, 전사한 노비들의 이름을 적어서 임금에게 올리고 공로를 챙기는 그 양극단을 그는 하나의 마음에 품고 있었다.

노량은 그의 마지막 바다이다.
명량에서 노량으로 나아가는
정유년 겨울에 그의 일기는 때떄로

- 비와 눈이 내렸다. 서북풍이 불었다.
- 눈이 내렸다.
- 흐렸다 맑았다 뒤범벅이었다.

처럼 간단한 한 줄이다.
이 한 줄의 문장으로 전쟁의 하루를 마감하면서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는 눈보라 치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1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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