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부재는 역설적으로 그분을 내 삶 속에서 새롭게 현존하게 했다. 너무나 강렬했던 상실의 슬픔은 엄마의 질병 아래, 그리고 10년 가까이 내 연구 주제였던 트라우마로 점철된 역사 밑에 묻혀 오랫동안 잊었던 기억을 되살려냈다. 그것은 전형적인 조현병 환자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매력적이고 유능하며 놀라울만큼 생산적인 첫 번째 엄마에 대한 기억이었다. 이 기억의 전면에는 항상 음식이 있었다. 즐거움의 원천으로, 수입의 원천으로, 아니면 좀더 근본적인 생존의 방식으로 음식을 먹는 장면으로돌아가서 나는 발견했다. 엄마를 망가뜨린 것뿐만 아니라 엄마를 살아 있게 했던 것을.
나는 엄마의 파편을 모아 그분의 생존에 대한 한 편의 이야기를 엮어내고 싶다. 글쓰기로 엄마의 존재를 되살려, 페이지 위에서 그분의 유산을 살아 숨 쉬게 하고, 그 자취를 따라 내 유산을 찾고 싶다. - P23

식구들은 엄마의 작은 주방에 간편하게 물만 붓거나 통조림만 따면 쉽게 먹을 수 있는 즉석식품도 많이 쟁여두었다. 올케는 엄마가 라면과 과일 통조림은 먹어도, 분유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고 했다. 엄마가 굶지 않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영양이 턱없이 부족한 식단이라 그게 신경 쓰였다.
"엄마, 음식 잘 잡고 계세요?" 내가 물었다.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백질은요?"
엄마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코를 킁킁거렸다. "나한테 분유를 주더라."
"아, 그래요?" 나는 놀란 척하며 말했다.
하던 생각이 끊긴 듯, 엄마는 잠시 조용해지더니 환각적 몽상에 깊이 빠져드는 듯했다.
"그 맛은 진절머리가 나." 엄마는 말했다. "전쟁 같은 맛이야."
엄마가 묻지도 않았는데 전쟁 얘기를 꺼낸 건 이번이 겨우 두번째였다. 그 말을 듣자 연구 내용이 파편처럼 머릿속에 떠올랐고 나 역시 몽상에 빠져들었다. 죽은 엄마의 시신 옆, 흙길 바닥에 나앉아 있는 아기들, 네이팜탄에 화상을 입고 미라처럼 붕대를 감은 여자들의 모습. 미군기가 공중에서 폭탄을 떨어뜨려 아이를 잃은 노근리 학살 생존자 여성의 말. 그날 미국의 두 얼굴을봤어요! 미국의 식량 원조를 회고하는 전쟁 신부의 말. ‘양키‘가 우리를 구하러 왔다는 말을 들었어요…. 쌀이나 보리를 기다리던 차에, 먹을 게 넉넉히 올 거란 생각에 침을 흘렸죠..... 그랬는데 분유만 끝없이 쏟아졌고, 그걸 타서 마시는 사람마다 며칠씩 설사로 고생을 했어요? - P39

"단일 민족, 단일 국가"라는 일국일민주의 기치를 내걸었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양부인과 혼혈 아동의 존재를 "사회적 위기"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는 "미군 아기 문제의 해결책으로 이 아이들을 초국적 입양 대상자로 만드는 대통령령을 선포했다. 미국 선전물은 이 혼혈 아동들이 가난하고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로 공산주의의 손아귀에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취약한 처지에 있다고 묘사하면서, 이들을 구제하는 것이 미국인의 애국적 의무라고 선전했다.
이와 더불어, 사회복지사들은 기지촌에서 일하는 여성들에게한국이 그들의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아버지의 나라야말로 아이들이 가야 할 곳이라고 설득하는 공격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실제로 한국 법에 따르면 현실이 그러했다. 한국인 어머니와 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공립학교에 다닐 수 없었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등록할 수도 없었다.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이승만 정부의 정책으로 우리 망명의 조건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 P58

1987년쯤 되자 이민자를 혐오하던 사람 몇몇은 그래도 우리가족에게는 익숙해졌지만, 태평양 연안을 따라 정착하는 아시아인들을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로 보았다. 어떤 순간에는 타자에대한 이들의 공포감이 시나처럼 새로 온 이민자를 향해 파도처럼 솟구쳤고, 다른 순간에는 적개심이 미세한 파문처럼 먼지차별microaggression"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땐 이런 개념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전이었다.
난 칭크랑 잽 싫어. 걔네는 모든 걸 장악하려 들어. 네 얘기 하는 건 아니야! 너는 괜찮아. 너는 그런 사람들하고 다르잖아.
내가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나 스스로도 미국화된 반 미국인인 나는 이들과 다르다고마음 한구석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한구석으론 이런 말을 들으며 모욕감을 느끼고 괴로워했다. 그것은 내 아메라시안Amerasian 이중 의식이었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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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2021년 1월 5일, 조지아주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백인 우월주의가 오랫동안 정치판을 잠식했던 바로 그 주에서 유권자들은 그들의 첫 번째 아프리카계 미국인 상원 의원 레버런드 라파엘 워녹Reverend Raphael Warnock과 첫 번째 유대계 미국인 상원 의원을 기록적인 수치로 선출했다. 워녹은 재건 시대 이후 미국 남부 지역에서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공화당 정치인 팀 스콧Tim scott에 이어 두 번째로 선출된 흑인 상원 의원이었다. 그날 밤 워녹은 옛날에 소작농이었던 자신의 어머니에게 지지자들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남들의 면화를 골라내던 여든두 살 어머님 손이 당신의 막내아들을 미국 상원 의원으로 뽑았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 선거 결과를 희망찬 민주주의의 미래를 나타내는 전조라고 봤다. ‘흑인 유권자도 소중하다 Black Voters Matter‘라는 이름의 단체를 공동 설립한 라토샤브라운 LaTosha Brown은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남부가 떠오르고 있다. 더 젊고, 더 다양하고 (…) 그리고 더 포용적인 모습으로." 이는 시민권운동가 세대가 구축하고자 했던 민주주의의 미래였다.
다음 날인 1월 6일, 미국인들은 상상조차 힘든 장면을 목격했다. 그것은 미국 대통령이 나서서 부추긴 폭동이었다. 이로써 4년에 걸친 민주주의 퇴보가 쿠데타 미수로 정점을 찍었다. 그 광경을 지켜봤던 많은 미국인은 다른 나라 국민들이 그들의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 느꼈던 공포와 혼란, 분노의 감정을 똑같이 느꼈다. 정치적 목적으로 시작된 폭력의 흐름, 선거운동원에 대한 위협, 투표를 더 힘들게 만든 갖가지 시도,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는 대통령의 획책 등 미국인들이 목격한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민주주의의 퇴보였다. 물론 2016~2021년 사이에 미국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동안 민주주의가 퇴보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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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책 쓰기는 혁명이다!
책이 중심에 있는 사회

히키타 사토시의 《즐거운 자전거 생활》이라는 책을 행복한 기분으로 읽었다. 방송 프로듀서인 저자는 자신이 자전거 전문가도 레이서도 아니지만 자전거의 즐거움만큼은 남들보다 많이 안다며 이렇게 썼다. "모든 분들이 자전거를 타는 즐거움과 감동을 느끼고, 자전거가 우리 사회에 아주 이롭다는 것을 알아준다면 정말로 좋겠다."
이 책에는 초심자에게 유용한 조언들이 가득하다.
오른쪽 브레이크와 왼쪽 브레이크가 어떻게 다른지, 버스나 스쿠터가 옆에 있으면 어떻게 피하는 게 좋은지,
도난을 방지하기 위한 방법은 어떤 게 있는지 등등.
그런 팁도 좋았지만 나는 무엇보다 저자의 비전에감탄했다. 히키타는 21세기를 헤쳐나갈 희망은 자전거에 있다고 단언한다. 그는 자전거는 우리의 마지막 교통수단이며, 자전거를 타서 환경을 살리고 인간성을 회복하자고, ‘자전거를 가운데 핵(核)에 둔 어떤 사회‘를 만들자고 주장한다. - P10

지식의 전파와 의사소통이라는 부문에서도 마찬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사건의 얽히고설킨 배경과 이면을 이해하는 데 에너지를 들이고 싶어 하지않는다. 짧고 명쾌한 설명과 즉각적인 즐거움을 원한다. 책 한권은 고사하고 다소 긴 탐사보도 기사조차 읽기 버거워한다. 그래서 카드뉴스와 인공지능의 기사요약 서비스가 나왔다. 그마저도 동영상으로 넘어가는 추세다. 이제 곧 5분짜리, 아니 50초짜리 핵심 요약 동영상들이 글자를 대체할 것이다. 가만히 놔두면.
그런 ‘스낵 정보들은 여러 사연을 생략하고, 복잡한 이해관계를 단순화한다. 스낵 정보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횡행하고 음모론과 반지성주의가 퍼지기도 쉽다. 어떤 정보가 궤변인지 아닌지, 그정보를 어느 정도 중요성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판단하려면 머릿속에 지식의 구조와 맥락이 먼저 있어야한다. 그런데 제대로 된 지식의 구조는 스낵 정보들만으로는 만들 수 없다. - P13

다시 말해 ‘작가‘가 아니라 ‘저자‘를 목표로 삼으라는 게 내 조언이다. 저자를 목표로 삼으면 무엇을 연습해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작가의 작업에 대해 책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글을 쓰는 것이라고, 한 문장을 쓰고 다음 문장을 쓰고 또 다음 문장을 쓰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작가가 될 수 있다고 오해한다. 그것은 다른 훈련 없이 슈팅 연습만 계속했더니 축구선수가 됐다거나, 부품을 하나하나 이어 붙였더니 어느새 비행기가 조립돼 있더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작가의 일에는 주변을 둘러보고 무엇을 쓸지 고민하는 것이 포함된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실용서든 마찬가지다. 이런 기획력 역시 훈련해서 길러야 한다. 반응하는 글(때로 배설하는 글)과 기획하는 글은 다르다. 그차이를 느껴봐야 한다. 에세이 열아홉 편의 글감은 있는데 추가로 써야 하는 한 편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않아 속을 썩이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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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ㅍ1976년 워싱턴주 셔헤일리스

나는 다섯 살, 가족과 메인가를 걷는다. 평소 별일 없이 조용한시내인데 오늘은 풍선과 깃발로 떠들썩하다. 천둥 같은 소리로 행진곡을 연주하며 악대가 지나간다. "오늘은 미국의 이백 번째 생일이란다." 짧은 곱슬머리 노부인이 내게 붉은색, 흰색, 푸른색 성조기 색깔의 아이스바를 건네며 말한다. 나라를 위해 생일 파티를 하다니 우습다는 생각이 들지만, 애국심이 무슨 뜻인지, 미국인이라는 것 혹은 미국에서 아시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슨뜻인지 알기에 나는 너무 어리다. 나는 동남아시아에서 벌어지는 격전들에 대해서도, 휴전 상태인 한국전쟁에 대해서도, 아시아인들의 이민이 미국 제국주의나 반공주의의 이름으로 700만명의 무고한 사람을 학살하고도 [마치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가없다는 듯 ‘냉전‘이라는 잘못된 이름으로 불린 국제질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모른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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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람들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점이 여럿 있었다. 먼저, 프랑코는 엄밀히 말해서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비견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귀족계급과 가톨릭교회를 등에 업은 군사 반란을 통해 일어섰고, 특히 처음에는 파시즘을 실현하기보다 봉건주의를 되살리려고 시도했다.
노동계급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부르주아의 다양한 집단.
즉 현대화된 파시즘의 지지자들 역시 프랑코에게 반대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스페인 노동계급이 우리 영국 사람들과는 달리 ‘민주주의‘와 현체제의 이름으로 프랑코에게 저항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저항에는 확실한 혁명적 분출이 동반되었다. 어쩌면 그런 분출로 구성된 저항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지 모른다. 농민들이 토지를 차지했고, 공장과 대부분의 교통수단은 노조의 차지가 되었다. 교회는 엉망이 되고 사제들은 쫓겨나거나 목숨을 잃었다. <데일리 메일>은 가톨릭 성직자들의 환호 속에서 프랑코를 악마 같은 ‘빨갱이‘ 무리에게서 나라를 해방시키는 애국자로 묘사한 기사를 쓸 수 있었다. - P288

여러 당파가 서로를 향해 쏟아내는 중상모략과는 별도로, 전쟁 때흔히 들을 수 있는 말들, 열변, 영웅을 찬미하고 적을 비방하는 말, 이 모든 것이 여느 때처럼 싸우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왔다. 여러 면에서 적과 맞서 싸우기보다는 100마일쯤 도망칠 사람들이었다. 이번 전쟁의 서글픈 결과 중하나는 좌익 언론이 우익 언론과 똑같이 거짓을 일삼는다는 사실을 내가 배웠다는 점이다. 우리 편, 즉 정부 편에게 이번 전쟁이 평범한 제국주의 전쟁과 달랐다고 나는 진심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전쟁 선전만 보면 그 점을 전혀 짐작할 수 없다. 싸움이 아직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았을때 좌우 신문 모두가 동시에 똑같은 욕설 구렁텅이로 뛰어들었다. <데일리 메일>의 포스터를 우리 모두 기억한다.
"빨갱이들이 수녀를 십자가에 못박다." <데일리 워커>는 프랑코의 외인 군단이 "살인자, 백인 노예를 거래하는 자,마약중독자, 유럽 모든 나라의 찌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고 말했다. 1937년 10월에도 《뉴 스테이츠먼》은 파시스트군대가 살아 있는 아이들의 몸으로 바리케이드를 만든다는 이야기(바리케이드를 만들기에는 가장 불편한 재료다)를 우리 앞에 내놓았고, 아서 브라이언트 씨는 "보수주의 상인의 다리를 톱으로 썰어내는 것"이 스페인의 프랑코 반대 세력 사이에서는 "흔한 일"이라고 단언했다. 이런 글을쓰는 사람들은 싸움에 나서는 법이 없다. 어쩌면 이런 글을 쓰는 것으로 싸움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는 건지도 모른다. 어느 전쟁이나 똑같다. 군인은 싸우고, 기자는 소리치고, 진짜 애국자는 짧은 선전용 견학을 제외하면 전선의 참호 근처에 가지 않는다. 비행기가 전쟁의 조건을 바꿔놓고 있다는 점이 때로 내게 위안이 된다. 다음 세계전쟁 때어쩌면 역사상 유례가 없는 광경, 즉 강경파 애국자의 몸에 총알구멍이 난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 P313

스페인 상황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어야 마땅한 사람들이, 스페인에 대해 진실을 말한다면 그 말이 파시스트 선전 활동에 이용될 것이라는 이유로 스스로 기만에 몸을 맡겼다.
이런 비겁함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만약 스페인 내전에 대한 진실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면, 영국 국민은 파시즘이 무엇이고 거기에 맞서 어떻게싸워야 하는지 배울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파시즘을 경제적인 진공 속에서 윙윙거리는 블림프 대령‘ 특유의 살인적 광증으로 묘사한 <뉴스 크로니클>류의설명이 그 어느 때보다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해서우리는 ‘파시즘에 맞선‘(1914년 전쟁의 ‘군국주의에 맞선 참조) 위대한 전쟁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그 전쟁에서 영국판 파시즘은 일주일도 채 지나기 전 우리 목에 씌워진 굴레가 될 것이다. - P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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