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에 의존하는 현대적 기업식 농업의 소위 녹색혁명은 전혀 지속가능성이 없다. 코넬대학의 데이비드 피멘텔은 전 세계가 지금의 미국과 같은 방식으로 먹고 농사를 짓는다면 우리에게 알려진 세계의 모든 화석연료 매장량이 단 7년 만에 고갈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지에 따르면, 한 마리의 암소를 키우는 데 1배럴(약 159리터)의 원유가 필요하다. 현대의 농업은 표토를 1년에 2.5센티미터의속도로 훼손시킨다. 자연이 생산성 있는 토양 25센티를 만드는 데는1000년의 시간이 걸린다. 미국 중서부에서는 30리터의 옥수수를 키우기 위해 60리터의 표토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기업식 농업은 엄청난 양의 화석연료 비료와 유독한 화학물질에 의존한다. 지하수를 보충되는 것보다 25퍼센트 빠른 속도로 퍼 올린다. 결국 소규모 유기농 농법으로 재배할 수 있는 것보다 적은 식량이 생산된다. 1991년 영국의학연구회의 연구는 채소의 경우 1940년에 비해 최대 75퍼센트의 영양소를 잃었고 고기는 무기물의 절반을, 과일은 약 2/3를 잃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 P308

이렇게 안정적인 지구가 종말을 고하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기업들이 자연재해로 이익을 얻는 정반대 상황이 펼쳐진다. 정부 계약을따내고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하면서 자신들의 수익을 늘리는 것이다.
문제의 근원은 정부도 기업도 자원 사용에 완전 원가 회계 (full costaccounting)를 쓰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정부는 경제의 건전성을 평가하는 척도로 GDP (gross domestic product, 국내총생산)를 사용한다. GDP는 공기와 물의 청결성, 토양의 건전성, 생태계의 생물다양성, 해수 온도와 같이 재화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자연 자원을 뒷받침하고 유지하는 요소들이 아니라, 생산된 재화의 가치로 국가 경제의 건전성을 측정한다. 이 때문에 자연자원을 보호하기는커녕, 자주 유출되는 위험 물질 인근 대수층의 오염, 유독 대기오염 등의 위험에도 불구하고지구에 남은 기름 한방울까지 짜내겠다는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 P311

그렇다면 토양 건강의 회복이 기후변화를 되돌리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는 주장은 어떨까? 이 형제들은 의도치 않게 이 주장도 증명해 주었다. 전형적인 방식으로 관리된 토지가 공기 중으로 더 많은 탄소를 내보내서 기후변화를 악화시키고, 토양 내의 탄소를 다시 회복시키는 자연의 능력을 떨어뜨린다는 것을 잊지 말라. 되살림 유기농 농법을 사용한 토지의 토양을 분석한 과학자들은 탄소 함량이 매년 토지 1헥타르당 톤씩 늘어났다는 것을 발견했다. 공기 중의 탄소가 해마다 1헥타르당 9톤씩 토지로 되돌아간 것이다. 기후변화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농부와 목장주들은 산출량을 늘리고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사실 되살림 유기농 농법을 사용하는 농지는 풀을 먹는 가축에 대한 ‘수용력‘이, 전형적인 농법을 사용하는 농지보다 2배 이상 높다.
우리로서는 영양적 가치가 더 높은 식품을 먹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지구에 45억 헥타르의 초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우리 모두가 현명한 아들의 되살림 유기농 농법을 따른다면 얼마나 많은 이산화탄소를 토지로 끌어들여서 식량과 비옥함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지 상상해 보라. 우리는 수십억 톤의 산소를 토지로 끌어들여 기후변화를 역전시킬 수 있다. 오늘날 세계가 이용할 수 있는 대단히 귀중한 기회이며, 파타고니아가 수용하려고 애쓰는 기회이다.
-래리 코팔드 - P313

1990년대 중반 네 명의 사람들이 캘리포니아 수원림의 웅장한 고대삼나무 숲을 벌목으로부터 보호하자는 시위를 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들은 파타고니아 인턴들이었다. 우리 회사의 인턴 과정을 거치는 직원들은 최대 2개월까지 회사를 떠나 환경단체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파타고니아는 그들에게 봉급과 직원 복지를 계속 제공했다. 특정한 상황에서는 회사가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하거나 환경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사람들을 위해 보석금을 내준다. 우리는 정부가 법을 어기고 집행을 거부하려 하면 시민불복종이 마땅한 행동 방침이라고 믿는다. - P339

정기적으로 미국 가족계획연맹(Planned Parenthood, 미국 내 인권 및 가족계획 운동 단체)을 지원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우리 제품을 절대 사지않을 것이라는 수천통의 편지를 받았다. 표적이 된 모든 기업(모두가파타고니아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은 통일된 대응을 하기로 했다. CAC가우리 매장에서 집단 피켓 시위를 하겠다고 위협했을 때 우리는 플레지어피켓(Pledge-a-Picket, 직역하면 피켓 하나씩에 대한 약속 - 옮긴이)이라는 전략을 사용했다. 피켓 시위자 한 명당 그 사람의 이름으로 가족계획연맹에 10달러씩을 기부하겠다고 맞선 것이다. 그들은 시위에 참가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보이콧은 무산되었다. <뉴욕타임스>는 우리를 ‘용감‘하다고 묘사했다. 이후 우리는 가족계획연맹 지지자들로부터 수천통의 편지를 받았다. 1993년 우리는 산림보호 단체에 대한 지원을 막으려는 비슷한 보이콧 시도 역시 막아냈다. - P355

나는 모든 일에서 달인이 되는 길은 단순함을 향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복잡한 기술 대신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다. 많이 알수록 필요한 것은 적어진다.
나 자신의 삶을 단순하게 만들려는 미미한 시도들을 통해 나는 보다 단순하게 살아야, 혹은 그렇게 살기로 선택해야 정말 중요한 모든 면에서 빈곤하고 결핍된 삶이 아닌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 P3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그로스만 소설의 등장인물 하나가 부르짖듯이,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의 핵심적인 공통점은 일정 집단의 사람들에게서 사람으로 여겨질 권리를 빼앗는 그들의 능력에 있었다. 따라서 유일한 답은 그것이 말도 안 된다고 외치는 일, 외치고 또 외치는 일뿐이었다. 유대인과 부농은 "사람이다. 그들도 사람인 것이다. 나는 이제 우리 모두가 사람임을 알았다." 이것은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허구적 세계‘라고 불렀던 것에 저항하는 문학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떼지어 죽어간 까닭은 스탈린이나 히틀러 같은 지도자들이 부농이나 유대인이 없는 세상을 꿈꾸고, 실제의 세계를 자신들의 꿈에 맞춰 뜯어고치기로(완벽할 수는 없다 해도) 했던 데 있다고 주장했다. 사람이 죽는다는 일이그 도덕적 무게를 잃었다. 그 일이 비밀로 행해졌기 때문이라기보다, 그런 죽음은 마땅하다는 이야기에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도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진보라는 연극의 배우로 강제 동원되었고, 그 연극이 이념적 적의 저항을 받을 때도 아니 어쩌면 그런 때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로스만은 이 세기의 시끄러운 소음에서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가려냈고, 끝없는 정치 논쟁 가운데 그들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했다. - P681

소련과 나치 독일 모두에서, 유토피아는 비전으로 제시되고, 현실과 타협되고, 대량학살로 실행되었다. 1932년에는 스탈린이, 1941년에는 히틀러가 그렇게 했다. 스탈린의 유토피아는 9주에서 12주 동안 소련을 집단화하는 것이었다. 히틀러의 것은 그와 같은 시간에 소련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모두 돌이켜보면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가지 다 큰 거짓말의 힘을 빌려 실행에 옮겨졌다. 심지어 실패가 명확해졌을 때조차 멈춰지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체는 정책의 견실함에 대한 증거물로 제시되었다. 따라서 히틀러와 스탈린은 둘 다 특정 형태의 폭군정치를 했다. 그들은 최악의 상황을 연출하고, 자신들의 선택을 두고 적들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우며, 수백만 명의 목숨을 빼앗고는 자신들의 정책이 필요하다고, 또는 바람직하다고 입증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했다. 두 사람 다 유토피아를 뒤바꾼 형태를 제시했다. 다시 말해서, 원래의 유토피아가 실현 불가능하다고 판명되었을 때, 대량학살 정책을 ‘실질적인 승리‘로 대신 내세웠다.
집단화도 ‘마지막 해결책‘도, 무오류의 존재라고 내세워진 지도자를 지키기 위해 막대한 사람들의 희생을 요구한 것이라는 점에서 똑같았다.  - P683

지역민 착취 도구가 비슷해 보이고 어떤 때는 아예 똑같기도 했지만, 두 체제는 서로 다른 미래 비전에 이들 도구가 복무하도록 했다. 국가사회주의 비전에서는 집단들 사이의 불평등이 본질적이고 바람직했다. 세상에 불평등은 당연히 존재한다. 부유한 독일과 가난한 소련이 그 예다. 그것은 더 늘어나야 한다. 한편 소련 시스템이 확장될때 다른 사람들도 소련식 평등을 얻도록 할 것이다. 그보다 더 극적인 계획이란 없고, 이미 충분히 극적이었다. 소련 시스템이 유목민을 만나면, 그들이 정착하도록 강제할 것이다. 농민을 만나면, 국가에 식량을 대도록 강제할 것이다. 여러 민족을 만나면, 그들 가운데 상층 계급을 제거할 것이다(흡수, 강제이주, 살육 등으로). 자족하고 있는 사회를 만나면, 소련 시스템을 모든 가능한 세상 중 최상으로 추구하게끔 강요할 것이다. 그 특별한 의미로 ‘내포적‘ 사회가 되도록, 독일이 그제국의 다수의 주민에게서 평등한 자격을 박탈했던 반면, 소련은 거의 모든 사람을 소련식 평등으로 끌어안았다. - P687

스탈린의 대계획에서, 농업 집단화는 소련을 공업국가로 바꾼다는의미가 있었다. 적어도 당시의 국경선 안에서 말이다. 집단화는 기근을 불러왔으며, 스탈린은 의도적으로 그것이 우크라이나에 집중되도록 했다. 이는 대공포에도 영향을 주었다. 대공포란 처음에는 외침 세력에 협조할 가능성이 있는 소외된 농민들을 대상으로 했던 것이다.
히틀러의 대계획은 다분히 정반대였다. 그는 국외 테러에서 시작했으며, 먼저 그가 소련 지도부에 속해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부터 치고, 그리하여 그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부터 하려 했다. 그리고 그는 집단농장을 활용해 독일에 잉여 농산물을 보급하려 했다. 장기적으로, 그는 독일인이 다스리고, 유대인은 없으며, 노예 상태가 된 슬라브인이 드문드문 있는 방대한 변방 제국을 건설하려 했다. 히틀러는 언제나 유대인 없는 유럽을 꿈꿨다. 그러나 그가 군사력으로 동방 식민 제국을 세우려는 꿈을 유지하는 이상 결코 수백만 명의 폴란드와 소련과 발트 삼국의 유대인들을 전멸시키지도, 통치하지도 못했다. - P6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그러나 소련보다 더 산업화된 나라들에서 1차 경제5개년 계획 때와 같은 소련의 급속한 산업 성장 경제 모델이 언제까지 통용될 것이며, 그런 나라들의 국민이 바라는 높은 생활 수준을 충족시켜줄 수있을 것인가? 공산당 지도자들이 분명 외세인 소련에 굴종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동유럽 사회가 언제까지 공산주의는 민족해방이라고 반아들여줄 것인가? 미국이 번영과 자유의 상징처럼 비치는 상황에서, 서방 세계를 숙적이라고 보는 모스크바의 이미지메이킹이 언제까지 성공할 것인가? 스탈린은 그가 뽑은 동유럽 지도자들이 그의 뜻에 따르고, 민족주의를 활용하며, 각자의 국민을 서방세계와 단절시키기를 바랐다. 이 모두를 함께 성취하기란 정말 어렵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난제를 한꺼번에 푸는 임무는 스탈린의 새로운 선전장관이자 측근인 안드레이 즈다노프에게 주어졌다.  - P602

1947년 9월, 유럽 공산당 지도자들은 폴란드에 모여 즈다노프의 새로운 노선을 경청했다. 예전에는 독일의 휴양지였고, 최근까지 슈라이벨라우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던 스클라스카 포렘바에서의 모임에서, 그들은 각자의 당이 "공산주의 국제행정국", 즉 "코민포름"을 창설하는 데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모스크바가각 공산당을 지휘하고 그 정책을 조정하는 수단이 될 것이었다. 그자리에 모인 공산당 지도자들은 세계가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고, 즉 진보 진영과 반동 진영이 되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소련은 새로운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진영을 이끌도록 운명지어졌고 미국은 퇴락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모든 결점(최근 나치 독일이 여실히 보여준)을 물려받았다는 말도 들었다. 또한 건드릴 수 없는 역사의 법칙은 진보 진영의 최종 승리를 보장한다는 말도. - P603

이처럼 유대인이 높은 비율로 학살되었다는 사실은 다른 문제도 드러냈다. 독일군이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점령한 소련 땅에서 그토록 많은 학살을 저지를 수 있었느냐였다. 그들은 소련인들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전쟁을 경험한 모두가 알았다시피, 독일군은 대규모였으나 점령지마다 주둔한 병력은 적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독일 민간 행정부와 경찰은 서부 소련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에는 수가 적었다. 심지어 대량학살을 꾸준히 벌일 정도에는 한참 못 미쳤다. 결국 원래의 지역 공무원들이 새로운 상사들 밑에서 계속 일했고, 지역 청년들이 경찰에 자원입대했으며, 게토에서는 일부 유대인이 다른 유대인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동쪽에서의 총살은 어떤 식으로든 수십만 명의 소련인과 연루된 일이었다(그런 점에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서쪽인 피점령 폴란드 소재 죽음의 공장들에서 중요한 작업은 소련인들이 했다. 트레블린카, 소비부르, 배우제츠에 소련인 직원들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독일군이 부역자를 필요로 하고, 찾아냈음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부역활동은 ‘증오스러운 파시스트 침략자들에게 가열차게 저항함으로써, 조국의 영예를 지켰노라‘는 ‘단합된 소련 국민‘이라는 신화에 걸림돌일 수밖에 없었다. 그 점에서 유대인 대량학살은 잊혀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 P613

좀 더 고상한 형태로는, 이처럼 인종 학살에 대해 말을 아낀 것은 세상을 인종 위주로 봤던 히틀러의 방식을 인정하기 싫었던 데 따른 결과였다. 유대인들은 어느 한 나라의 국민이 아니다. 그렇다면 유대인 학살이라고 할 때 그들을 하나의 인종 단위로 정의하게 되며, 결국 히틀러식으로 세상을 인종별로 구분하는 그림을 그려주게 될 것이 아닌가? 좀 덜 고상한 형태로는, 그런 침묵은 일반적으로 퍼져 있었던 반유대주의를 반영했다. 특히 소련, 폴란드, 영국, 미국의 반유대주의를 런던과 워싱턴의 경우, 이 긴장은 1945년의 승전으로 해소되었다. 미국인과 영국인들은 전쟁 전에 유대인 인구가 상당했던 유럽지역은 하나도 해방시키지 않았으며, 독일의 중요한 죽음의 공장도 전혀 보지 않았다. 전후 서유럽과의 경제, 정치, 군사 협력의 필요성은 유대인 문제에 관심이 덜 가게끔 했다. - P614

처음에, 소련 지도부는 이스라엘이 소련과 친한 사회주의 국가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리고 공산주의권은 다른 어느 곳보다 열심히 이스라엘을 지지했다. 1947년 하반기, 7만 명의 유대인이 폴란드를 떠나 이스라엘로 가는 것을 허가받았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그 직전에 소련에서 추방되어 폴란드로 온 사람들이었다.
국제연합이 1948년 5월에 이스라엘을 승인한 뒤(소련은 찬성표를 던졌다), 이 신생 국가는 이웃 나라들의 침공을 받았다. 이제 막 탄생한 이스라엘 군대는 국방을 제대로 했으며, 많은 경우 오히려 아랍국가들의 영토를 유린했다. 폴란드는 자국 영토에서 유대인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팔레스타인에 파견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무기 지원을 했다. 아서 케스틀러의 말처럼, 배편으로 이스라엘로 보내진 무기들은 "유대인들에게 소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일으켰다!" 그러나 1948년 말, 스탈린은 소련이 그 유대 국가에 영향을 주는 것보다 그 유대인들이 소련에 영향을 주는 게 더 크다고 판단했다. - P619

전후 티토는 스탈린에게 외교 독립의 의지를 표명했다. 그는 스탈린을 따르는 발칸 연방 수립 구상을 포기하라고 말했다. 그는 인근 그리스의 공산혁명 운동가들을 지지했는데, 스탈린은 미국과 영국의 세력권에 그리스를 남겨두고 있었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1947년 3월에 ‘미국은 그리스에서 공산주의가 확산하지 못하도록 행동을 취할 것‘이라며 자신의 독트린을 천명했다. 스탈린은 혁명 모험을 계속하기보다 유럽에서 자신이 이미 얻은 걸 지키는 쪽을 선호했다. 그는 티토를 실각시키고 더 고분고분한 유고슬라비아 지도자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럴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티토와 스탈린의 대립은 국제 공산주의체제의 틀을 바꿨다. 티토의 독립적 자세와 그 뒤에 이어진 코민포름의 유고슬라비아 축출은그를 부정적인 "일국 공산주의"의 모델로 만들었다.  - P630

워싱턴에서는 중국 공산당을 세계 공산혁명의 연속으로 봤지만, 스탈린에게 이는 희소식이지만은 않았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은 동유럽 공산당 지도자들처럼 스탈린의 종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이 스탈린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했지만, 스탈린은 그 당에 개인적 통제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이 야심 있고 예측 불가능한 라이벌이 될 것임을 알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에서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동아시아 정책을 만들며, 스탈린은 이제 소련이 세계 공산주의의 지도자라는 위치를 유지하는 목표에 열중해야 했다. 이런 우려는 먼저 한반도 문제에서, 공산 국가 하나가 막 수립된 땅과 관련해서 일었다. - P642

 비록 570만 명의 유대인의 죽음을 가져왔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유대인에게 스탈린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민족국가를 세울 수 있게 해주었다. 1930년대의 적대국들처럼, 유대인들은 이제 소련 내부의 불안 요인(4년 동안의 숙청과 공식적 반유대주의로)이자, 소련 바깥에 원조 세력(이스라엘)을 갖고 있는 세력이며, 국제분쟁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세력(미국과의 내통으로)이었다. 전례가 어땠는지는 분명했고, 대응 논리도 탄탄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는 이제 끝나가고 있었다. - P655

소련은 스탈린의 죽음 뒤 약 40년을 더 지속했다. 그러나 그 보안기구는 다시는 인위적 기근이나 대량 사살을 실시하지 못했다. 스탈린의 후계자들도 나름대로 야만적인 인간들이었으나, 스탈린식의 대중 테러는 삼갔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스탈린의 후계자가 된 니키타 흐루쇼프는 예전에 그 자신이 수용소로 보낸 우크라이나 죄수들을 대부분 석방했다. 대량학살을 막을 힘이 없어서 막지 못했다는 것은 흐루쇼프를 두고 할 말이 아니다. 그는 1937년에서 1938년까지 누구보다 앞장서서 테러를 벌였고,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앞장서서 우크라이나를 재정복했다. 그보다 그는 소련이 더 이상 종전처럼 굴러갈수 없음을 알았다고 봐야 하리라. 그는 심지어 1956년 당 전체회의 연설에서 스탈린의 범죄 일부를 폭로하기도 했다. 비록 공산당 간부들의 고난에 초점을 두고, 더 많은 숫자의 학대받은 집단(농민, 노동자, 그리고 소수 민족)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루었지만 말이다. - P658

아마도, 아렌트의 말처럼, 나치와 소련의 대량학살은 현대사회에내재된 뭔가 심층적인 어두움의 상징일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현대성이나 그 밖의 무엇무엇에 대해 그런 이론적인 결론을 내리기 전에,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해 확실히 팩트체크를 해야 한다. 홀로코스트에 대하여, 블러드랜드에 대하여 말이다. 실제로, 오랫동안 유럽의 대량학살 시대에 대해서는 이론이 실제를 넘어서고, 오해가 두드러진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렌트(참으로 많은 지식을 가졌던, 그러나 그 범위는 당시 구할 수 있었던 2차 문건에 한정된)와 달리, 우리는 이런 ‘이론에 지식을 맞추는 일‘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죽은 이들의 숫자는 오늘날 잘 알려져 있다. 어떤 경우에는 좀더 정확하고, 다른 경우에는 그렇지 못하지만, 적어도 두 체제의 파괴성을 파악하기에는 넘칠 만큼으로 알려져 있다. 민간인이나 전쟁포로를 죽이는 정책으로, 나치 독일은 블러드랜드에서 약 1000만 명을 학살했다(그리고 다른 지역까지 합하면총 1100만 명),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블러드랜드에서 400만 명 이상을 죽였다(총 600만 명), 기근, 인종 청소, 수용소 장기 재소 등으로 빚어진 죽음(예측 가능했던까지 치면, 스탈린에게 죽은 숫자는 아마도 900만 명, 나치는 1200만 명으로까지 늘어난다. 아무래도 이렇게 큰숫자는 완전히 정확하게 셀 수는 없다. 또한 적어도 수백만 명은 제2차 세계대전의 간접적 희생자로서, 두 체제 모두의 희생물이 되었다.
나치와 스탈린주의자들의 손길 모두가 가장 많이 닿은 곳은 바로블러드랜드였다. 오늘날의 지명대로 하면,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러시아 연방의 서쪽 변방, 폴란드의 대부분, 발트 삼국,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는 나치와 소련의 힘이, 그리고 악의가 서로 겹치고 얽힌 땅이었다. - P6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우리의 정책은 다른 사람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 한 언제나 유연한 근무를 보장하는 것이다. 서핑에 매진하는 사람은 다음 주 화요일 오후 2시에 서핑을 하러 가는 계획을 잡는 게 아니라 파도와 조수와 바람이 완벽할 때 서핑을 간다. 스키는 습기가 없는 가루눈이 올 때 타러 간다. 좋은 시기를 놓치지 않으려면 언제든 바로 나설 수 있는 근무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이런 생각이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이라는 이름의 근무시간 자유 선택 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 P278

관리직을 구할 때는 관리자와 진짜 리더의 차이를 아는지 확인하는일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은행의 지점장은 위험을 피하고(상부의 승인이 없는 대출을 하지 않고), 전략 계획을 실행하고, 평상시와 같이 일이 굴러가게 만들어야 한다. 조리사와 주방장의 차이와 비슷하다. 두 사람모두 음식을 만들지만 주방장은 요리법을 개발하고 주방을 관리하는반면 조리사는 요리법을 따라 할 뿐이다. 리더는 위험을 감수하고,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전략계획을 세우고, 변화를 만든다.
최고의 리더십은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다. 말린다와 나, CEO의 사무 공간은 모두에게 열려 있고 우리는 늘 사람들과 만날 여유를 갖기위해 노력한다. 우리나 고위 경영진 누구에게도 특별한 주차 공간을 주지 않는다. 가장 좋은 자리는 연료 효율이 높은 차들의 몫이다. 차주인이 누구든 말이다. 말린다와 나는 카페테리아에서 돈을 내고 밥을 먹는다. 그렇지 않으면 직원들에게 회사의 것을 가져가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꼴이 될 것이다. - P290

유목사회는 상황이 나빠지고 나서야 짐을 꾸리고 거처를 옮긴다고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명한 리더는 모든 일이 잘 돌아갈 때, 누구나 느긋하고, 게으르고, 행복한 때에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안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진짜 위기가 닥쳤을 때 움직이지 못할 수도 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렇게 말했다. "기분 좋은 평화와 안정 속에서 인간의 영혼은 얼마나 빨리 죽어 가는지."
밥 딜런이 노래하듯이, "사람은 느긋하게 태어나서 바쁘게 죽어 간다."
문화와 가치관이 뚜렷한 회사에 새로 들어온 직원이라면, 평지풍파를 일으키거나 현상에 이의를 제기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있다. 물론 가치관은 절대 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모든 조직, 기업, 정부, 종교는 적응력과 회복력을 가져야 하며 새로운 아이디어와 운영방법을 끊임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 P296

경고
1992년 참여 과학자 모임(Union of Concerned Scientists)이라는 일단의 사람들이 세계의 상태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성명을 내놓았다.‘ 104명의 노벨 수상자를비롯한 전 세계 1700명 이상의 과학자들이 여기에 서명했다. 다음은 이 선언문의 일부이다.

인간과 자연계는 지금 충돌 과정에 있다. 인간의 활동은 환경과 주요 자원을 무차별 공격하여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있다. 제지하지 않으면 기존의 관행들이 우리 사회, 동식물계의 미래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방식으로는 삶을 지속할 수 없을 만큼 현 세계를 변화시키게 될 것이다. 현재의 방향이 불러올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시급하다.
이 선언문에 서명한 세계 과학계의 원로 과학자들은 이 자리에서 전인류에게 우리 앞에 놓인 것들에 대해 경고한다. 인류의 엄청난 비극을 피하고 지구상의 우리 안식처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지구와 모든 생명체를 관리하는 방식에 큰 변화가 필요하다.
인류는 종으로서의 생존, 생존할 수 있는 조건, 인간적이라는 의미와관련해 진정한 세계적 위기를 처음으로 맞고 있다. 우리가 지성과 통찰력, 신속함으로 행동에 나설 의지와 기지를 가지기만 한다면 원칙적으로과학자들이 언급한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 없다.

이 경고들에 대한 흔한 반응은 그 진실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보다 정교한 형태의 부정은 전문 분야를 넘어서는 문제를 걱정할 시간이나 지식이 없다고 변명하는 것이다. 이런 모든 형태의 부정 뒤에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 문제를 해결하거나 기술이 때맞춰 인류를 구해 줄 것이란 근거 없는 희망이 있다.
- 이본쉬나드 - P3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1943년7월 19일 바르샤바 게토 폐허 속에 문을 연 바르샤바 강제수용소야말로 나치의 가장 끔찍한 창조물이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과정이었다. 맨 먼저 독일이 이른바 게토라 이름 붙인 바르샤바의 특정 지역에 유대인들을 밀어넣는다. 그러고는 주변 지역에서 이미 수용 인원을 한참 초과한 이곳으로 또 다른 유대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수만 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목숨을 잃게 만든다. 그 뒤 25만 명이 넘는 게토 유대인들을 트레블린카 가스실로 보내고, 이 추방 과정에서 약 1만7000명이 총에 맞아 죽는다. 이 작업이 끝나면 독일은 자신들이 만들었던 게토를 해체한다. 그것이 불러온 저항을 억누르고자 다시 약 1만4000명의 유대인을 사살한다. 그러고는 바르샤바 게토의 건물들을 모조리 불태운다. 마지막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이곳에 또다시 새로운 수용소를 만드는것이다.
바로 이것이 바르샤바 강제수용소의 실체였다.  - P533

이 같은 상황은 봉기를 부추기되 도움은 주지 않는 완벽한 스탈린주의적 감각을 만들어냈다. 마지막 순간까지, 소련은 선전을 통해 도움을 약속하며 바르샤바에 봉기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봉기가 일어나자 약속했던 도움은 온데간데 없었다. 비록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바르샤바 군사 작전을 멈춘 것이라 여길 까닭은 없지만, 비스와의 교착 상태는 그의 정치적 목적에 잘 들어맞았다. 소련의 관점에서 보면 바르샤바 봉기는 독일인들, 그리고 독립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폴란드인들을 줄인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것이었다. 독일은 상당수가 겹치는 폴란드 지식인 및 폴란드 국내군 병사 제거라는 소련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을 대신 해줄 것이었다. 실제로 폴란드 국내군 병사들이 독일에 맞서 싸울 준비를 끝내자마자, 스탈린은 이들을 협잡꾼 및 범죄자 집단이라 불렀다. 훗날 소련이 폴란드를 손에 넣게 되면, 히틀러에 맞서 저항했던 이들에게는 범죄 혐의가 적용될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의 통제를 벗어난 무장 행동은 공산주의자들의 기반을 약화시킨다는 논리에서였으며, 오직 공산주의 정권만이 폴란드 유일의 합법적인 정권이었다. - P550

영국과 미국은 바르샤바 폴란드인들에게 의미 있는 도움을 줄 수없을 뿐이었다. 그 개인의 집요한 끈기가 전쟁의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던 윈스턴 처칠의 경우를 보자. 그는 영국의 동맹인 폴란드에게 도움은 커녕 소련과 타협할 것을 주문하고 있었다. 이미 1944년 여름처칠은 폴란드 수상 스타니스와프 미코와이치크에게 모스크바를 찾아가 그동안의 소련-폴란드 간 단교를 회복시킬 합의를 청해보라고 조언했다. 미코와이치크가 모스크바에 도착한 1944년 7월 말, 영국대사는 그에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는 말을 건넸다. 즉 폴란드 영토의 절반인 동쪽 땅을 포기하고, ‘학살의 책임은 소비에트가 아닌 독일에 있다는) 소련 버전의 카틴 대학살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미코와이치크가 알고 있던 것처럼, 루스벨트 역시 카틴에 대한 소비에트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쪽을 선호했다. 바르샤바 봉기가 시작된 그 순간 미코와이치크는 모스크바에 있었다. 이처럼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놓인 미코와이치크는 스탈린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지만, 스탈린은 이마저 거절했다. 이에 이번에는 처칠이 스탈린에게 폴란드인들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보냈다. 스탈린은 8월 16일, 자신은 그런 "멍청하고 위험한 행동"을 도와줄 의사가 눈곱만큼도 없다는 말로 이를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 P551

미국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만일 미국의 비행기가 소련 영토에서 연료를 공급받을 수 있게 되면, 그들은 이탈리아에서 폴란드로 날아가 독일 거점을 폭격하고 폴란드인들을 돕는 등의 공중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스탈린이 처칠의 요청에 퇴짜를 놓은 1944년 8월 16일 바로 그날, 미국 외교관들은 유럽 동부 및 동남부 일대를 공중에서 폭격하는 ‘프랜틱 작전‘에 폴란드 지역 목표물들을 추가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러한 임무 수행을 위해 동맹 미국이보낸 연료 보충 요청을 거절했다. 당시 미국의 차관급 외교관이던 조지 케넌의 눈에 비친 이 거절은 "악의에 찬 희열과 함께 장갑을 내팽개치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미국에 사실상 자신이 폴란드를 차지할것이며, 폴란드 전사들이 그곳에서 죽어 없어지길, 그리고 봉기는 실패하길 바란다고 이야기한 것이었다. 한 달 뒤, 봉기가 사실상 실패로돌아간 시점에 이르자 스탈린은 자신의 힘과 지략을 드러내 보이며역사의 한 장을 혼탁하게 만들었다. 바야흐로 9월 중순, 폭격이 바르샤바의 그 어떤 결과물도 전혀 바꾸지 못하게 된 그때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그는 자신의 영역 극히 일부에 미국이 폭격을 감행하도록 허가해주었다. - P552

1944년 10월 초, 힐러는 당시 바르샤바 나치 친위대 및 경찰 수장인 파울 가이벨에게 히틀러가 가장 바라는 것은 바르샤바의 완전한 파괴라고 이야기했다. 그곳에는 돌무더기 하나도 남아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힘러 본인의 소망이기도 했다. 전쟁은 패색이 짙었다. 앤트워프는 영국군의 손에 떨어졌고, 미군은 라인강을 향해다가오고 있었으며, 붉은 군대는 곧 부다페스트를 에워쌀 것이었다. 하지만 힘러의 눈에는 그만의 전쟁 목표이자 동유럽 종합 계획의 필수 요소, 즉 슬라브족 그리고 유대인의 도시 말살을 실현할 기회밖에 보이지 않았다.
분명 힘러는 10월 9일에서 12일 사이에 도시 구역별로 남은 건물하나하나까지, 바르샤바 전체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럽의 다른 어떤 수도도 바르샤바처럼 참담한 운명을 맞은 곳은없었다. 그곳은 물리적으로 완벽하게 파괴되었으며, 전체 인구의 절반을 잃었다. 바르샤바 봉기 기간 중 1944년 8월에서 9월에만 폴란드인 비전투원 약 15만 명이 독일인들 손에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이미 비슷한 숫자의 바르샤바 비유대 폴란드인들이 강제수용소에서, 게토 내부 처형지에서, 혹은 전투 과정에서 독일인들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목숨을 빼앗긴 유대인들의 숫자는 절대 수에서 이보다 높았고, 사망률은 훨씬 더 높았다. 바르샤바 유대인의 사망률은 90퍼센트 이상으로, 약 30퍼센트인 비유대인의 사망률을 한참 넘어서는 수치였다. 민스크나 레닌그라드 같은 동부 도시들만이 바르샤바와 비견될 수준이었다. 대체로 보면, 전쟁 전 약 13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도시의 주민 절반가량이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 P555

 폴란드 병사들은 자신들과 조국의 자유를 위해 독일에 맞서 싸우던 이들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불행한 운명이었다. 스탈린은 봉기 당시 훨씬 작은 규모로 싸우던 공산주의 계열의 폴란드 인민군은 기쁜 마음으로 지원했다. 폴란드 국내군이 아닌 폴란드 인민군이 봉기를 주도했다면, 그의태도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찬가지로 사실과 완전히 다른 폴란드였으리라. 폴란드 인민군이 대중적 지지를 제법 받은 것은 분명 사실이었지만, 폴란드 국내군이 얻은 것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전쟁 기간에 폴란드의 정치 지형은 여타 유럽의 점령 지역들이 그랬듯 분명 좌익 쪽으로기울었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전쟁 기간내내 폴란드는 이미영토 절반에 해당되는 동쪽 지역에서 소비에트공산주의를 몸소 겪었다. 폴란드 권력자 그 누구도 공산주의자가 되진 않을 것이었다. 바르샤바 봉기는 한 세대의 가장 영리하고 용감한 사람들 다수를 사라지게 만들었고, 이에 더 이상의 저항을 너무나 어렵게 만들어버렸다. - P557

강간의 규모는 붉은 군대가 독일 땅에 들어서면서 더 커져갔다. 그이유는 따지기 어려웠다. 원칙적으로는 평등주의적인 소련이 가장 원초적인 차원에서는 여성의 신체를 존중하지 않았다. 독일인들에 대한 실제 경험과는 별개로, 붉은 군대 병사들은 소련 체제의 산물이었다. 그것도 대개 그중 가장 악랄한 체제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약 100만명의 강제수용소 수형자가 전선에서 싸우게끔 풀려났다. 모든 소련병사는 그들의 나라처럼 가난한 나라를 짓밟은 독일의 어리석음에 치를 떠는 듯 보였다. 독일 노동자들의 집조차 그들의 집보다 더 좋았던 것이다. 병사들은 때때로 그들이 "자본가들"만 공격했다고 말했으나 그들의 시각에서는 보통 독일 농부도 말할 수 없을 만큼 부유했다. 그러나 그처럼 명백히 나은 삶을 살고 있음에도 독일인들은 소련에 쳐들어와 강도질과 살육을 자행했던 것이다. 소련 병사들은 독일남성들을 모욕하고 경멸하는 의미로 독일 여성들을 강간하는 것이기도 했다. - P571

전쟁 중(또는 심지어 그 전부터) 스스로 독일인이라 했던 많은 사람이 이제는 폴란드인을 자처했으며, 따라서 수송을 피했다(그때쯤에는 폴란드 정부가 인종적 순수성보다 노동력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어, 누군가를 폴란드인으로 볼지 독일인으로 볼지 모호한 상황에서 전자의 주장에 호의적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앞서 스스로를 폴란드인으로 주장하던 사람들 다수도 독일인이라며 주장을 바꿨는데, 독일의 경제적 미래가 폴란드보다 나아 보였기 때문이다).  - P582

폴란드 정권은 오직 동맹국 소련만이 새로 얻은 서부 변경지대를독일로부터 지켜줄 수 있으며, 미국은 거기에 기껏 지지해줄 뿐이라고 강력히 주장할 수 있었다. 1947년에 보면 폴란드인들 스스로가, 공산당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든 상관없이, "수복 영토"를 잃을 생각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고무우카가 정확하게 예기했다시피, 독일계의 추방은 "민족을 체제에 결속시켜줄 것"이었다. 명석한 공산주의 이론가였던 야쿠프 베르만은 공산당이 인종 청소의 대부분을 맡아야만한다고 여겼다. "수복 영토"는 전쟁 중 고난을 겪은 많은 폴란드인에게 더 나은 집과 더 큰 농장을 줄 것이었다. 그것은 공산주의로 가는 첫걸음인 토지개혁을 가능케 해줄 것이었다. 그리고 아마 무엇보다 그것은 동부 폴란드(소련에 병합된)에서 넘어온 100만 명의 폴란드 이주민에게 살 곳을 마련해줄 것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폴란드가 동쪽에서 많은 땅을 잃었으므로, 서쪽은 그만큼 소중해진 셈이었다. - P5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