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소련보다 더 산업화된 나라들에서 1차 경제5개년 계획 때와 같은 소련의 급속한 산업 성장 경제 모델이 언제까지 통용될 것이며, 그런 나라들의 국민이 바라는 높은 생활 수준을 충족시켜줄 수있을 것인가? 공산당 지도자들이 분명 외세인 소련에 굴종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동유럽 사회가 언제까지 공산주의는 민족해방이라고 반아들여줄 것인가? 미국이 번영과 자유의 상징처럼 비치는 상황에서, 서방 세계를 숙적이라고 보는 모스크바의 이미지메이킹이 언제까지 성공할 것인가? 스탈린은 그가 뽑은 동유럽 지도자들이 그의 뜻에 따르고, 민족주의를 활용하며, 각자의 국민을 서방세계와 단절시키기를 바랐다. 이 모두를 함께 성취하기란 정말 어렵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난제를 한꺼번에 푸는 임무는 스탈린의 새로운 선전장관이자 측근인 안드레이 즈다노프에게 주어졌다. - P602
1947년 9월, 유럽 공산당 지도자들은 폴란드에 모여 즈다노프의 새로운 노선을 경청했다. 예전에는 독일의 휴양지였고, 최근까지 슈라이벨라우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던 스클라스카 포렘바에서의 모임에서, 그들은 각자의 당이 "공산주의 국제행정국", 즉 "코민포름"을 창설하는 데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모스크바가각 공산당을 지휘하고 그 정책을 조정하는 수단이 될 것이었다. 그자리에 모인 공산당 지도자들은 세계가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고, 즉 진보 진영과 반동 진영이 되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소련은 새로운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진영을 이끌도록 운명지어졌고 미국은 퇴락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모든 결점(최근 나치 독일이 여실히 보여준)을 물려받았다는 말도 들었다. 또한 건드릴 수 없는 역사의 법칙은 진보 진영의 최종 승리를 보장한다는 말도. - P603
이처럼 유대인이 높은 비율로 학살되었다는 사실은 다른 문제도 드러냈다. 독일군이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점령한 소련 땅에서 그토록 많은 학살을 저지를 수 있었느냐였다. 그들은 소련인들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전쟁을 경험한 모두가 알았다시피, 독일군은 대규모였으나 점령지마다 주둔한 병력은 적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독일 민간 행정부와 경찰은 서부 소련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에는 수가 적었다. 심지어 대량학살을 꾸준히 벌일 정도에는 한참 못 미쳤다. 결국 원래의 지역 공무원들이 새로운 상사들 밑에서 계속 일했고, 지역 청년들이 경찰에 자원입대했으며, 게토에서는 일부 유대인이 다른 유대인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동쪽에서의 총살은 어떤 식으로든 수십만 명의 소련인과 연루된 일이었다(그런 점에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서쪽인 피점령 폴란드 소재 죽음의 공장들에서 중요한 작업은 소련인들이 했다. 트레블린카, 소비부르, 배우제츠에 소련인 직원들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독일군이 부역자를 필요로 하고, 찾아냈음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부역활동은 ‘증오스러운 파시스트 침략자들에게 가열차게 저항함으로써, 조국의 영예를 지켰노라‘는 ‘단합된 소련 국민‘이라는 신화에 걸림돌일 수밖에 없었다. 그 점에서 유대인 대량학살은 잊혀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 P613
좀 더 고상한 형태로는, 이처럼 인종 학살에 대해 말을 아낀 것은 세상을 인종 위주로 봤던 히틀러의 방식을 인정하기 싫었던 데 따른 결과였다. 유대인들은 어느 한 나라의 국민이 아니다. 그렇다면 유대인 학살이라고 할 때 그들을 하나의 인종 단위로 정의하게 되며, 결국 히틀러식으로 세상을 인종별로 구분하는 그림을 그려주게 될 것이 아닌가? 좀 덜 고상한 형태로는, 그런 침묵은 일반적으로 퍼져 있었던 반유대주의를 반영했다. 특히 소련, 폴란드, 영국, 미국의 반유대주의를 런던과 워싱턴의 경우, 이 긴장은 1945년의 승전으로 해소되었다. 미국인과 영국인들은 전쟁 전에 유대인 인구가 상당했던 유럽지역은 하나도 해방시키지 않았으며, 독일의 중요한 죽음의 공장도 전혀 보지 않았다. 전후 서유럽과의 경제, 정치, 군사 협력의 필요성은 유대인 문제에 관심이 덜 가게끔 했다. - P614
처음에, 소련 지도부는 이스라엘이 소련과 친한 사회주의 국가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리고 공산주의권은 다른 어느 곳보다 열심히 이스라엘을 지지했다. 1947년 하반기, 7만 명의 유대인이 폴란드를 떠나 이스라엘로 가는 것을 허가받았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그 직전에 소련에서 추방되어 폴란드로 온 사람들이었다. 국제연합이 1948년 5월에 이스라엘을 승인한 뒤(소련은 찬성표를 던졌다), 이 신생 국가는 이웃 나라들의 침공을 받았다. 이제 막 탄생한 이스라엘 군대는 국방을 제대로 했으며, 많은 경우 오히려 아랍국가들의 영토를 유린했다. 폴란드는 자국 영토에서 유대인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팔레스타인에 파견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무기 지원을 했다. 아서 케스틀러의 말처럼, 배편으로 이스라엘로 보내진 무기들은 "유대인들에게 소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일으켰다!" 그러나 1948년 말, 스탈린은 소련이 그 유대 국가에 영향을 주는 것보다 그 유대인들이 소련에 영향을 주는 게 더 크다고 판단했다. - P619
전후 티토는 스탈린에게 외교 독립의 의지를 표명했다. 그는 스탈린을 따르는 발칸 연방 수립 구상을 포기하라고 말했다. 그는 인근 그리스의 공산혁명 운동가들을 지지했는데, 스탈린은 미국과 영국의 세력권에 그리스를 남겨두고 있었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1947년 3월에 ‘미국은 그리스에서 공산주의가 확산하지 못하도록 행동을 취할 것‘이라며 자신의 독트린을 천명했다. 스탈린은 혁명 모험을 계속하기보다 유럽에서 자신이 이미 얻은 걸 지키는 쪽을 선호했다. 그는 티토를 실각시키고 더 고분고분한 유고슬라비아 지도자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럴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티토와 스탈린의 대립은 국제 공산주의체제의 틀을 바꿨다. 티토의 독립적 자세와 그 뒤에 이어진 코민포름의 유고슬라비아 축출은그를 부정적인 "일국 공산주의"의 모델로 만들었다. - P630
워싱턴에서는 중국 공산당을 세계 공산혁명의 연속으로 봤지만, 스탈린에게 이는 희소식이지만은 않았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은 동유럽 공산당 지도자들처럼 스탈린의 종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이 스탈린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했지만, 스탈린은 그 당에 개인적 통제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이 야심 있고 예측 불가능한 라이벌이 될 것임을 알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에서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동아시아 정책을 만들며, 스탈린은 이제 소련이 세계 공산주의의 지도자라는 위치를 유지하는 목표에 열중해야 했다. 이런 우려는 먼저 한반도 문제에서, 공산 국가 하나가 막 수립된 땅과 관련해서 일었다. - P642
비록 570만 명의 유대인의 죽음을 가져왔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유대인에게 스탈린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민족국가를 세울 수 있게 해주었다. 1930년대의 적대국들처럼, 유대인들은 이제 소련 내부의 불안 요인(4년 동안의 숙청과 공식적 반유대주의로)이자, 소련 바깥에 원조 세력(이스라엘)을 갖고 있는 세력이며, 국제분쟁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세력(미국과의 내통으로)이었다. 전례가 어땠는지는 분명했고, 대응 논리도 탄탄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는 이제 끝나가고 있었다. - P655
소련은 스탈린의 죽음 뒤 약 40년을 더 지속했다. 그러나 그 보안기구는 다시는 인위적 기근이나 대량 사살을 실시하지 못했다. 스탈린의 후계자들도 나름대로 야만적인 인간들이었으나, 스탈린식의 대중 테러는 삼갔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스탈린의 후계자가 된 니키타 흐루쇼프는 예전에 그 자신이 수용소로 보낸 우크라이나 죄수들을 대부분 석방했다. 대량학살을 막을 힘이 없어서 막지 못했다는 것은 흐루쇼프를 두고 할 말이 아니다. 그는 1937년에서 1938년까지 누구보다 앞장서서 테러를 벌였고,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앞장서서 우크라이나를 재정복했다. 그보다 그는 소련이 더 이상 종전처럼 굴러갈수 없음을 알았다고 봐야 하리라. 그는 심지어 1956년 당 전체회의 연설에서 스탈린의 범죄 일부를 폭로하기도 했다. 비록 공산당 간부들의 고난에 초점을 두고, 더 많은 숫자의 학대받은 집단(농민, 노동자, 그리고 소수 민족)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루었지만 말이다. - P658
아마도, 아렌트의 말처럼, 나치와 소련의 대량학살은 현대사회에내재된 뭔가 심층적인 어두움의 상징일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현대성이나 그 밖의 무엇무엇에 대해 그런 이론적인 결론을 내리기 전에,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해 확실히 팩트체크를 해야 한다. 홀로코스트에 대하여, 블러드랜드에 대하여 말이다. 실제로, 오랫동안 유럽의 대량학살 시대에 대해서는 이론이 실제를 넘어서고, 오해가 두드러진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렌트(참으로 많은 지식을 가졌던, 그러나 그 범위는 당시 구할 수 있었던 2차 문건에 한정된)와 달리, 우리는 이런 ‘이론에 지식을 맞추는 일‘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죽은 이들의 숫자는 오늘날 잘 알려져 있다. 어떤 경우에는 좀더 정확하고, 다른 경우에는 그렇지 못하지만, 적어도 두 체제의 파괴성을 파악하기에는 넘칠 만큼으로 알려져 있다. 민간인이나 전쟁포로를 죽이는 정책으로, 나치 독일은 블러드랜드에서 약 1000만 명을 학살했다(그리고 다른 지역까지 합하면총 1100만 명),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블러드랜드에서 400만 명 이상을 죽였다(총 600만 명), 기근, 인종 청소, 수용소 장기 재소 등으로 빚어진 죽음(예측 가능했던까지 치면, 스탈린에게 죽은 숫자는 아마도 900만 명, 나치는 1200만 명으로까지 늘어난다. 아무래도 이렇게 큰숫자는 완전히 정확하게 셀 수는 없다. 또한 적어도 수백만 명은 제2차 세계대전의 간접적 희생자로서, 두 체제 모두의 희생물이 되었다. 나치와 스탈린주의자들의 손길 모두가 가장 많이 닿은 곳은 바로블러드랜드였다. 오늘날의 지명대로 하면,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러시아 연방의 서쪽 변방, 폴란드의 대부분, 발트 삼국,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는 나치와 소련의 힘이, 그리고 악의가 서로 겹치고 얽힌 땅이었다. - P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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