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손자에게 쏟는 나의 사랑과 정성이 갚아야 될 은공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아름다운 정서로 남아 있길바랄 뿐이다. 나 또한 사랑했을 뿐 손톱만큼도 책임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내가 불태운 것만큼의 정열, 내가 잠 못 이룬 밤만큼의 잠 못 이루는 밤으로 갚아지길 바란 이성과의 사랑,
너무도 두렵고 무거운 책임감에 짓눌려 본능적인 사랑 또한 억제해야 했던 자식 사랑……. 이런 고달픈 사랑의 행로 끝에 도달한, 책임도 없고 그 대신 보답의 기대도 없는 허심한 사랑의 경지는 이 아니 노후의 축복인가.
- P148

"내가 너한테 어떤 정성을 들였다구. 아마 들인 돈만도 네 몸무게의 몇 배는 될 거다. 그런데 학교를 떨어져엄마의 평생소원을 저버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장가들자마자 네계집만 알아. 이 불효막심한 놈아."
이런 큰소리를 안 쳐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만 아이들을 위하고 사랑하리라는 게 내가 지키고자하는 절도다. 부모의 보살핌이나 사랑이 결코 무게로 그들에게 느껴지지 않기를, 집이, 부모의 슬하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기를 바랄 뿐이다.
- P15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가 반추하는 건 주로 사랑받은 기억입니다. 문명과는 동떨어진, 농사짓고 길쌈하고 호롱불 켜고 바느질하고 사는 산골 벽촌에서 태어났습니다. 물질적으로 넉넉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으니, 요샛말로 하면 결손가정이었지요. 부족한것 천지였습니다. 넉넉한 건 오직 사랑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움받거나 야단맞은 기억은 없고 칭찬받고 귀염받은 생각밖에 나는 게 없습니다. 그게 이른 새벽잠 달아난 늙은이 마음을 한없이 행복하게 해줍니다.
- P1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어려서 대단한 울보였던 모양으로 너무 울어서 어른을 애먹인 에피소드가 다양한데 그중엔 노을이 유난히 붉던 날, 할머니 등에 업혀서 그걸 손가락질하며 몹시 울었다는 얘기도 있다. 등에 업혀 다닐 만큼 어릴적 일이니까 그걸 보고 왜 울었는지 생각날 리는 없고,
아마 강렬한 빛깔에 대한 공포감이었겠지 정도로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때 느닷없이 그게 생생하게 되살아난것이다.
그건 이미 단풍이 아니었다. 고향 마을의 청결한 공기, 낮고 부드러운 능선, 그 위에 머물러 있던 몇 송이 구름의 짧고 찬란한 연소의 순간이 거기 있었다.
어쩌면 그건 기억도 상상도, 그 두 가지의 혼동도 아닌 이해가 아니었을까? 나의 어릴 적의 그 울음은 자연의 신비에 대한 나의 최초의 감동과 경외였다는 걸 살날보다 산 날이 훨씬 더 많은 이 초로初老의 나이에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 P1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에서 깼을 때, 새로운 날이 밝아 있었다.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노튼은 변하지 않았다. 노튼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여전히 내 옆에서, 여전히 내가 자기를 안고 있는 것에 만족한 채. - P24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친절한 사람과의 소통

지난겨울은 추위도 유별났지만 큰 눈은 또얼마나 자주 왔는지. 나는 도시보다 기온이 3~4도는 낮은 산골 마을에 살기 때문에 거의 한 달을 집에서 꼼짝못 하고 갇혀 지내다시피 했다. 나는 눈 공포증이 있다.
어머니가 눈길에서 가볍게 넘어지신 줄 알았는데 엉치뼈가 크게 부서지는 중상이어서 말년의 5~6년을 집 안에만 계시다가 돌아가신 후부터이다.
- P11

혼자 걷는 게 좋은 것은 걷는 기쁨을 내 다리하고 오붓하게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다리를 나하고 분리시켜 아주 친한 남처럼 여기면서, 70년 동안 실어 나르고도 아직도 정정하게 내가 가고 싶은 데 데려다주고 마치 나무의 뿌리처럼 땅과 나를 연결시켜주는 다리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늘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
- P13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잠에서 깬 듯 부수수한 얼굴이었다. 내가 먼저 사과를 했다. 자고 있었다면 깨워서미안하지만, 졸리면 집에 가서 편히 자야지 그런 불편한자세로 자면 쓰느냐고 말하다 말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소녀는 암말 안 했지만 참 별꼴 다 본다는 불손한 표정이 역력해서이기도 했지만, 소녀에게 집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느닷없이 들어서였다.
소녀의 옷차림은 초라하지도 사치하지도 더럽지도않은 그 나이에 맞는 정상적인 거였고, 머리 모양도 약간의 멋을 낸 티가 귀여운, 그 나이의 평균치의 머리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건물로서의 집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따뜻한 대화가 있고, 자유와 구속이 적당히 조화된 가정으로서의 집이었다.
- P48

그러나 그 작은 숲이 불안에 떨 적에 보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다. 특히 요새처럼 숲이 진녹색으로 두렵게 번들거릴 때 어디서 오는지 모를 수상한 바람이 숲을 흔들 적이 있다. 그럴 때 숲은 온몸에 비늘을 뒤집어쓴한 마리 거대한 공룡으로 변한다. 중생대의 공룡이 멸종의 예감으로 괴롭게 몸을 뒤채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는것은 상상력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감이다. 숲의 나무들이 저희들끼리 연대하여 한 마리의 거대한 공룡으로 변신한 걸 보면서 느끼는 공포감이 제발 나만의 것이었으면 좋겠다. 만일 사람들이 함께 그런 것을 느낀다면 어떡하든지 숲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다 콘크리트를 치든지 아파트를 짓든지 하고 말 것 같아서이다. 인간은 공포감을 느꼈다 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지 그것을 제거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숲이 괴롭게 뒤채는 건 미구에 닥칠 그런 운명을 예감하기 때문이 아닐까.
- P1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