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 고집쟁이 농사꾼의 세상 사는 이야기
전우익 지음 / 현암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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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산속의 약초처럼 귀한' 그, 전우익은 얼굴 가득하게 깊이 주름진 시간의 발자취를 간직하고 있었다. 높은 가을 하늘을 유영하는 구름처럼 하얗게 센 머리는 그의 소박한 성품을 보여준다. 가닥가닥 세어버린 눈썹은 왜소해보이나 강직한 그의 모습을 잘 나타낸다. 이런 그의 모습은 책 중간에 틈틈이 등장하는데, 편지글과 어우러져 직접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듯한 느낌이 든다. 받는 이는 내가 아닌, '스님'인데 말이다.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의 얼굴의 주름처럼 생각을 깊이, 그리고 많이 하는 사람임이 느껴진다. 철학가의 느낌마저 드는 것 같다. 역시나, 그는 참 많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다. 속세를 등지고 강호에서 삶을 이어가며 덜 먹고 덜 입는 그지만, 결국 속세에 대한 끝없는 상념은 어쩔 수 없나보다. 그가 한 말처럼.



"물 이야기가 억세고 착한 사람 이야기로 흘렀습니다.

사람이다 보니 사람 문제로 돌아간 모양입니다"


  그는 자연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속세의 깨달음으로 발현한다. 판에 모를 길러 던져 심는 '투묘'를 통해서 그는 노동이 놀이가 되었다고 했다. 심는 고역에서 해방되고, 수확량도 손이나 기계로 심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사회에서의 '노동'에 대해 논한다.


"사람은 노동을 통해서 사람이 된다고 하는데,

고역은 사람을 삐뚜러지고 잔인하게 만들어 왔다고 생각해요.

노동의 고역에 오랫동안 시달려 온 사람들은 일 자체를 부정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식들은 일을 시키지 않겠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자식들은 사무원, 공무원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무려 1990년대 초에 쓰여진 것이다. 한국이 산업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노동'이 아닌, '고역'을 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그들의 감정과 경험, 사회로부터의 대우는 2017년, 약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거의 노동자가 육체의 노동으로 한정된 것과 달리, 현재의 노동자는 사무 노동자, 육체 노동자 등으로 분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니, 오히려 노동자의 분화는 '육체 노동'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더욱 짙어지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나와 내 자식만은 일을 시키지 않겠다"는 것은 "극히 이기주의적인 발상"이라고 했다. 생활의 변화와 일의 변화의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것이다. 일을 변화시키는 일이 생활을 변화시키고, 삶의 방식과 태도를 변화사켜야 결국 나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초가 될 수 있다 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글 곳곳에서 불쑥불쑥 그 몸집을 드러낸다. 그의 흰 눈썹 몇 가닥처럼.


"제도나 이데올로기가 사람을 바꾸는 게 아니라

사람이 바뀐 토대 위에서 제도가 새로워지는 것이 진짜 발전이지요." 

  이 글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특히 '취업'에 대한 생각을.

  기업은 인재를 찾는 과정에 있어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람만을 고르려 한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편일률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얼마나 다양하고 독특한 사고가 이루어질까? 기업은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본질적인 이유부터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취준생들은 어떠한가. 기업의 구미를 당기게 하기 위해 진정한 '나'는 어느새 저 뒷편으로 제쳐둔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그럼에도 나 역시 '맛있는' 나를 기업에게 들이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만, 나를 향한 그 애정을 온전히 그들 앞에 내보여서는 안된다. 얼마나 슬프고 모순적인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원하는 곳을 찾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낭중지추'라 하였다. 과거에는, 아니 학창시절까지는 이것이 '특출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순간 '낭중지추'는 '특이한', '별난' 것과 같은 '부정'적인 존재가 되어버린다. 집단 속에서 튀는 것은 그 집단의 누구도 곱게 보지 않는다. 시기와 질투가 끈끈하게 얽혀든다. 사회에서 원만히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장점을 죽여야 하는 이 사회는 어디서부터 비틀린 것일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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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 - 170일간의 재판 기록으로 밝힌 10.26의 진실
안동일 지음 / 김영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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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

 

  2017.03.10, 지금은 전 대통령이 되어버린 박근혜의 탄핵이 가결되었다.  전국의 치킨가게는 손발이 바빠졌고, 학교의 학식이나 급식에는 잔치국수가 메뉴로 올라오는 등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국민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저마다의 기쁨을 표출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누군가의 묘소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파면 소식이 1면을 장식한 신문과 꽃, 법전, 시바스리갈 술병이 놓여졌다. 그 묘는 과거 박정희의 독재를 죽음으로 멈춘, 김재규의 묘이다.


  고등학교 시절, 역사와 관련된 동아리에 참여했던터라 그가 박정희를 죽여 민주주의에 힘을 쓴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은 알지 못했다. 정말 '결과'만을, 단편적인 것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에서는 10*26사태에 대한 사건의 전말과 재판과정, 그 후의 일들까지 '변호인'이라는 제 3자의 시선으로 소상히 밝히고 있다. 사건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마저 받을 수 있었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한 그 당시는 박정희가 이 나라에서 최고였던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살해에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김재규 본인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은 커녕, 이미 꺼져버린 촛불과 운명을 같이 했을 것임은 자명하다. 이러한 사실은 본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의를 위해서 용기를 가지고 실행에 옮긴 것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을 넘어서 주위의 시선과 흐름에 타협하지 않고 소신을 지켰다는 것 역시 존경할 만한 점이다. 사실 소신을 지킨다는 게 말이 쉬운 것 아닌가. 우리의 현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옷 하나를 입을 때에도 다른 사람의 시선을 걱정하며 너무 화려하지는 않은가 하는 걱정을 하곤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면 씁쓸한 미소를 띠면서도 결국 다시 옷장에 옷을 걸어두게 되는 현실이다.


  책의 가장 앞 부분에 실린 그의 사진을 보면, 그는 결코 남들보다 우월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수 있다. 사진 속 그는 주위의 헌병들보다 훨씬 작은 신장을 가졌으며, 얼굴 역시 보통 사람들처럼 햇빛에 그을리기도 했으며 주름이지기도 했다. 이렇듯 그는 범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사람들도 하기 어려울 법한 일을 해내었다. 그 원동력은 그의 외면에서 찾을 수 없다. 담대한 기백,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추진력, 소신에 따라 행동하는 것. 이 모든 것은 그가 내면 깊은 곳에 가지고 있던 것들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김영사의 또다른 책, <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이 생각났다. 백충현과 김재규는 자신이 해야하는 일을 한 인물이다. 그 지향점과 방법은 '펜'과 '칼'과 같이 대립되는 것이나 옳다고 생각한 일을 해내고,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일생을 바쳤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을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를 읽으면서도 똑같이 느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그 일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 책의 꽃은 뒤에 실려있는 <부록>이라고 생각한다. <부록>에는 실제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제출했던 자료들이 실려있다. 변론요지서, 항소이유서, 항소이유보충서(김재규), 상고이유서, 대법원 판결문 요지가 실려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김재규 본인의 항소이유보충서이다. 그는 자신이 박정희를 살해할 수 밖에 없던 이유를 밝히며,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재판을 받으면서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짐작하는 사람이라면 글 어느 구석에는 살고 싶다는 욕망이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김재규는 그러지 않았다. 오로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해야한다는 내용이 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사형시키지 말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이는 살기 위함이 아니었다. 자신이 사형되었을 때 일어나는 사회적 파장, 국민들의 혼란과 이를 틈탄 북한의 반응과 같은 것을 걱정하며 스스로 자결하게 해달라는 주장을 펼친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국가를 위했다.


  우리는 김재규의 일생을 돌아보며, 많은 것을 느껴야 한다. 다시는 박근혜와 같은 과거 유산의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존재가 한 나라를 대표하도록 두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의 숭고한 넋을 기리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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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인간과 일
토머스 대븐포트.줄리아 커비 지음, 강미경 옮김 / 김영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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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AI시대 인간과 일 - Only humans need apply



  언젠가 '기계가 사람의 일자리를 모두 빼앗을 것이다.', '더이상 인간이 설 자리는 없다.'와 같은 것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때가 있었다. 학교를 다닐 때, 기술과 과학 시간이나 미래의 직업을 생각해보는 시간에 꼭 언급되곤 했다. 어렸을 적에는 이런 말들을 꽤나 자주 들었기 때문인지 기계를 막연히 부정하곤 했다. 내가 사회에 뛰어들 때 쯤이면, 내가 일하려 하는 곳은 모두 기계가 자리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빠르고 편리한 디지털 문명에 더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이는 '아날로그 감성'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 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지금은 사람들이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더이상 어느 한쪽만을 선호하지 않게 되었고, 적재적소에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배분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떻게 활용하느냐와 컴퓨터가 일자리를 빼앗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컴퓨터는 아직까지는 무사한 우리의 일자리를 노리고 있다. 컴퓨터는 우리의 일상 업무 중 작은 일을 해결해나가다 결국 주 업무마저 해결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인간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과거처럼 또다시 기계를 배척해야 할까? 그러나 현재는 배척하려 해도 그럴 수 없다. 이미 컴퓨터는 우리의 업무 전반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노동자의 공급 과잉'현상이 나타나게 되어 임금하락이 극심한 모습을 오늘날 우리의 취업현황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한가지 희망적인 것은 기계는 인간의 관리가 필요하며, 인간은 기계로 둘러싸인 곳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이른바 '자동화의 고립증후군'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 일례로 일본의 사례를 들 수 있다.



"과도한 로봇공학의 채택은 최초의 '소등'공장 생산으로 이어졌고, 공장을 가동할 노동자는 극히 소수만 필요했다. 프레드릭 쇼트는 1988년에 출간한 "로봇 왕국 안에서"라는 저서에서 이른바 '자동화의 고립증후군'이라는 현상을 다루었다. 고참 노동자들은 그토록 진보한 과학기술의 일부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신참 노동자들은 인간관계가 제거된 일, 다른 기계를 작동시키고 프로그래밍하느라 스스로가 '로봇처럼 느껴지는'일에서 의미를 찾기 힘들어했다."


  이러한 현상은 미래 일자리 문제에 중요한 시사점이다. 지식노동의 자동화는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현상이다. 기계가 늘어나는 환경 속에서 인간은 적응해야하고, 그 방법은 기계보다 인간이 나은 점을 찾아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 바로 '전문가 사고', 즉 패턴을 인식해내는 두뇌의 능력이 인간이 일자리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는 방법이다.

AI시대 인간과 일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복잡한 의사소통이란 명쾌하게 전달된 정보보다 광범위한 상황해석 능력을 필요로 하는 의사소통을 말한다. 예를 들어 1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검진 기간에 환자에게서 정보를 끌어내고자 하는 의사는 복잡한 의사소통에 기댄다. "의사는 면담의 저 유명한 '마지막 순간', 그러니까 환자가 문을 나서며 어깨 너머로 '그런데 집사람이 위 통증에 대해 선생님께 꼭 말씀드리라고 하지 뭡니까'라고 말할 때 특히 유의해야 한다."

  즉 기계는 기존에 입력해 놓은 패턴의 범위 내에서만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기계가 하지 못하는 복잡한 의사소통의 과정을 인간이 해야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두뇌가 여전히 자동화 시스템을 앞지른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한꺼버에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전체를 보며 상황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계의 경우 한번에 하나의 것만 처리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 종합적 사고 인지 능력에 있어서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사람은 날로 진보하는 기술에 맞추어 자신이 설 수 있는 자리를 개척해야 한다. 또한 그에 맞춰 자신의 능력을 배양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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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주어는 무엇인가 - 헌법 묵상, 제1조
이국운 지음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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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말한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스스로가 귀중하게 취급되지 않을 때,

우리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정체와 본질을 궁금해하는 경향이 있다."


  왜? 왜 그럴까? 단순히 사람의 본능이라고 대답한다면, 납득하기 쉽지 않다.

  문장을 잘 뜯어보면,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스스로가 귀중하게 취급되지 않을 때" 라고 하는 걸 보아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스스로가 귀중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귀중하게 여겨지는 것을 당연한 듯이 생각하는 것일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한참을 고민해보았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것은 '공동체' 즉 '우리'보다 '나'가 더 상위계층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나'에서부터 비롯된다. 그것은 '공동체'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들의 집합이 곧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가 없으면 '공동체'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나'는 '공동체'보다 상위계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부제, 헌법 묵상 제1조

  '잠길 묵'자에 '생각 상'자를 써서 묵상이라고 한다. 곧, 헌법 묵상이란 헌법 생각에 잠긴다는 뜻이다.

이 부제가 부제답게 이 책 전체 꿰뚫고 있다. 그렇다면 헌법1조에 대해 생각해보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문장을 어떻게 생각해보아야 할까.

  책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문장에 군더더기가 없이 깔끔해서 생각할 거리가 없다. 그리고 사실 너무나 익숙한 문장이기에 당연하다고 여겨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매체로부터 이 헌법1조를 들어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깊게 뇌리에 박혔던 헌법1조는 영화 변호인에서 노무현 대통령 역을 맡았던 배우 송강호가 들려준 것이다. 헌법1조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국민들에게 잘못된, 올바르지 못한 정부와 상층의 부패를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을 실어주었다. 최근에 있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역시 헌법1조로부터 부여받은 힘으로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책을 읽다보니 이 짧은 두 문장에 얼마나 많은 것이 들어있는지 알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이 문장의 주체는 '우리 대한국민'이다. 사실 누구나 주권의 주인은 국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그러나 '국민'과 '우리 대한국민'은 다르다. 다음의 문장에서 알 수 있다.


"우리 대한국민이 말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우리 대한국민이 다시 말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우리 대한)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우리 대한)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라는 단어에서 오는 느낌과 '대한'의 국민이라는 것에서 오는 느낌이 가슴 깊이 전해지는 것 같다. '우리 대한국민'은 '여럿'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헌법1조는 서로가 서로에게 권한과 권리를 부여하고, 그에 따라 서로의 고유성을 인정한다는 것이 된다고 한다. 우리는 최근 촛불시위를 통해서 서로의 권리를 확인했다. '나'는 '나'에게 권리를 주고, '나'는 '나'의 권리를 인정했다. 주권과 모든 권력이 대한 국민에게 있고, 대한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책을 통해서 '헌법의 주어'를 공부한 것이 아니었다. 현장에서, 직접 촛불을 밝히고 찬 바람과 맞서 싸우면서 우리는 '헌법의 주어'를 공부했다. 나 스스로가 주체이고, 촛불을 든 우리 모두가 주체라는 것을 공부했다.

  역사의 한 장면 속에서 모두가 밝게 빛났고,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후대의 아이들에게 생생한 '헌법의 주어'를 말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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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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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먼 과거, 문자가 없어 기록하기 이전의 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이 남긴 유물, 그림과 같은 것에서 그들의 삶을 추적한다. 문자가 없었을 뿐이지, 그 시대에도 언어는 존재하였고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는 전승되어왔다. 마침내 문자가 생기고 구비전승 되어 온 이야기는 문자로 기록되어지기 시작했고, 그 기록은 현재에 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문자가 없을 때에도 문자가 있을때에도 사람들과 항상 함께 했던 것은 무엇인가. 바로 종교이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는 설화에서, 그림에서, 유물, 유적에 나타난다. 아주 먼 과거의 믿음은 종교라 부르지않고 토테미즘과 같은 용어를 써서 부르긴 하지만, 이들 모두 어떤 대상을 믿는다는 것에서 '종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상에의 믿음은 보이지 않는 끈을 만들어 사람들을 질서 속에서 살게 했다. 과거와 현재가 조금 다른 믿음의 양상을 보인다면, 그것은 '무교'를 가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필자가 그러하다.


  과거에는 그 대상을 믿지 않으면 안됐다. 믿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이 넓디 넓은 하늘에 덩그러니 떠있는 구름처럼 존재했던 때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천둥이 무서웠고, 바다가 무서웠다. 그들이 할 수 있던 것이라곤 하늘과 바다를 믿는 것이었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제사'가 그런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는 그렇지 않다. 그 하늘과 바다의 어떤 작용은 모두 '자연현상'일 뿐이고, 사람들은 그것에 대비하기 위해 '과학'으로 대표되는 지식을 쌓았다. 사람들은 더이상 하늘이 바다가 주는 시련이 무섭지 않았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하늘도 바다도 그 어떤 것도 더이상 무섭지 않은데 왜 사람들은 '신'을 믿을까? 왜 '종교'가 아직도 남아 있을까?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이 <호모데우스>에 들어있다.



  "과학이 부상함에 따라 적어도 몇몇 신화와 종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강해질 것이다. 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21세기의 난제들을 직시하기 위해, 우리는 매우 난처한 질문 하나를 재검토 할 필요가 있다. 근대 과학은 종교와 어떤 관계일까?


  <호모데우스>에서는 아주 쉬운 예를 들어 독자들을 이해시킨다.



  "오늘날 의사들이 질병의 원인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에서 찾듯이, 부두교 주술사들은 질병의 원인을 보이지 않는 정령에서 찾는다. 여기에는 초자연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다. 만일 당신이 어떤 정령을 화나게 하면 그 정령이 당신의 몸에 들어가 고통을 일으키는 것이다. 어떻게 이보다 더 자연적일 수가 있는가? 정령을 믿지 않는 사람들만이 정령들을 자연적 질서와 별개로 간주한다."

  즉 '자연적 질서'라는 것이다. 또 다른 예가 있다.


  한 유대교도 소년이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빠, 왜 우리는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 돼요?" 그러면 아버지는 자신의 길고 곱슬곱슬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긴 뒤 이렇게 대답한다. "얀켈레야, 그것이 세상의 작동원리란다. 너는 아직 어려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우리가 돼지고기를 먹으면 신이 우리를 벌하고, 우리는 나쁜 운명을 맞게 된단다. 이건 내 생각도, 랍비의 생각도 아니야. 랍비가 세상을 창조했다면 아마 돼지고기를 먹어도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세상을 창조했을 거야. 하지만 랍비는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어. 신이 하셨지. 그리고 이유는 모르지만 신은 우리에게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어. 그러니 우리는 먹으면 안된단다. 알겠니?"


  2016년에 한 영국인 소년이 자유당 하원의원인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빠, 왜 우리는 중동에 사는 이슬람교도들의 인권에 관심을 가져야 해요?" 아버지는 찻잔을 내려놓고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한다. "음, 던컨. 그것이 세상의 작동원리란다. 너는 아직 어려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중동에 사는 이슬람교도들까지 포함해 모든 인간은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똑같은 자연권을 가진단다. 이건 내 생각도, 의회의 결정도 아니야. 만일 의회가 세상을 창조했다면 보편인권은 온갖 이상한 발상들과 함께 어느 분과위원회에 처박혀 있었을 거야. 하지만 의회는 세상을 창조한 게 아니라 이해하려고 할 뿐이고, 우리는 중동에 사는 이슬람교도들의 자연권도 존중해야 한단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의 인권도 언젠가 침해당할 테니까. 그렇게 되면 나쁜 운명을 맞게 될 거야."


  모든 것은 세상의 작동원리, 즉 자연적 질서일 뿐이고 어떤 종교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차이에서 그 질서를 이해하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는 것이다. <호모데우스>에서는 이렇게 정리한다.


  "...인간이 창조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복종해야 하는 어떤 도덕법 체계를 믿고 있다는 의미일 뿐이다. 우리가 아는 한 모든 인간사회가 이런 도덕법 체계를 믿는다. 모든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어떤 초인적인 도덕법에 복종해야 하며 그 법을 어길 시 재앙이 닥칠 거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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