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커니 - 동길산 산문집
동길산 지음 / 헥사곤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16. 우두커니 - 동길산 산문집

우두커니

저자 동길산

출판 헥사곤

발매 201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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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오랜 시간을 달 아래에서 보낸 사람은 그 말에서, 그 손끝에서, 그 모습에서 세월의 향기가 난다.
이 책이 꼭 그렇다. 동길산 작가의 시간이 고스란히 배어 나온다. 산문집다운 산문집이라고 말하고 싶다.
늘 그렇듯 주변에 있는, 사소한 것들로부터 들려온 이야기들이 소담하게 적혀있다. 
  그가 써내려 간 문장들은 소소하지만, 그 문장이 나에게 준 것들은 결코 소소하지 않다.

하지만 꽃을 피워봐야 이름을 알게 될 나무가 있다.
줄기가 발갛고 쭉쭉 뻗어 준수하게 생긴 게 꽤 기대된다.
새 잎 나오기 바쁘게 옆집 새끼염소가 뜯어먹어 속상하지만
즐거운 비밀이 생긴 셈이다. p.15

  천하에 이름을 떨친 성인들은 자연을 가까이 했다. 그리고 그 자연에게서 우리네의 모습을 보며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삶의 이치를 찾곤 했다. 길가의 조약돌에서도 배움을 얻을 수 있다고 했던 그들의 말처럼 나는 오늘도 누군가가 쓴 한 문장으로 인해 많은 것을 얻는다.

  나도 아직은 꽃을 피우지 못한 상태인 것 같다. 내가 어떤 꽃을 피우게 될지에 대해 요즘들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그동안은 그 생각으로 인한 감정이 '초조함'이었다면, 이 글로 인해 '기대감'으로 바뀌게 된 것 같다. 나에게도 '즐거운 비밀'이 생긴 셈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도 나와 같이 즐거운 비밀을 가지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전방만 주시한 게 화근이었다.
주위 시선은 아랑곳없이 앞만 보고 내달린 게 회복불능의 함정이었다.
사람살이가 으레 그렇지 않겠나마는. p.17

  현대인들은, 우리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경쟁에 치여 앞만 보고 달리기 바쁘다. 심지어 자기계발을 해야 한다는 미명 아래, 자기 자신과도 경쟁하지 않는가. 요즘 빈번히 우리의 입에 오르내리는 TV 프로그램. <효리네 민박>이 바로 이러한 것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멀게만 느껴졌던, 우리의 우상이었던 스타 한 인물이 화장기 없는 얼굴로 그의 남편과 함께 차를 마시고, 요가를 하고, 한가롭게 앉아 제주도의 청명한 하늘을 보며 기타를 치고, 손을 마주 잡고 춤을 추는.
그런 소소한 일상의 웃음을 담아내는 프로그램이, 경쟁하느라 바쁜 현대인들의 삶에 돌을 던진 것이다.

그들을 보면서 누군가는 부러움을,
누군가는 대리만족을,
누군가는 훌쩍 떠나기 위한 준비를 할 것이다.
<효리네 민박>은 그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다음은 <우두커니> 속, 따뜻함을 느끼게 하는 구절을 가져왔다.

향기를 캐는 사람은 열에 아홉이 아낙. 처녀는 얼굴이 탄다고 꺼리고 남정네는 동작이 불편타고 꺼린다. 아낙이라고 얼굴 타는 게 아무렇지 않고 몸놀림이 편할까. 삶의 향기가 몸에 밴 아낙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향기를 캐느라 구부린 등이 세상 어느 곡선보다 따뜻해 보이고 부드러워 보인다. p.35

차갑고 긴 산골의 겨울밤. 아궁이 불티가 사그라지고 촉 낮은 전등이 불티처럼 가물거리는 밤. 골바람 물바람이 문틈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가습기 대용으로 들여놓은 엽차 주전자는 식은 지 오래. 그러나 나는 믿는다. 아랫목은 절절 끓고 있단 걸. 웃풍이 아무리 매서워도 바닥은 따뜻하단 걸.
p. 46

사진은 길다. 사진에 담긴 기억도 길고 사진에 담긴 세월도 길다. 사진 하단에 손으로 쓴 연도를 보면 지나간 세월은 정확히 37년. 긴 기억이고 긴 세월이지만 사진을 보는 순간만큼은 기억도 세월도 멈춘다. 살아계신 아버지, 그 곁에서 미소 짓는 젊은 엄아. 이젠 두 아이의 엄마인 막내 여동생은 태어나기 전이다. 다만 사진이 조금 낡고 조금 색 바랬을 뿐. p.55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따뜻함을 느꼈을까. 문득 화면 너머의 온기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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