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한 듯 다정한 - 엄마와 고양이가 함께한 시간
정서윤 글.사진 / 안나푸르나 / 2016년 5월
평점 :
품절


#14. 무심한 듯 다정한

무심한 듯 다정한

저자 정서윤

출판 안나푸르나

발매 2016.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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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엄마와 고양이의 시간을 카메라에 담고, 글로 순간을 기록한 책이다. 다음 강의까지 남는 시간이 있어 기분전환을 하고자 집어들었던 책이었다.

  필자는 고양이를 좋아한다. 누군가 꿈이 무엇이냐 물어볼때면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커다란 창 앞에서
마스크를 끼고 하루종일 고양이 털을 빗겨주고 싶어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 모습은 입가에 미소를 달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예상과는 달리 작가의 여는 말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고양이 때문이 아니었다. "엄마"와 "여성" 때문이었다.

사진 속 백발의 엄마는 여전히 고왔고,
카메라 앞에 서면 미처 깨닫지 못한 여자의 모습으로 돌아가 예쁘게 찍히고 싶어 하셨다.

  그래. 엄마는 '엄마'라는 이름의 '여성'이었다. 왜 나는, 우리는, 엄마를 '여성'으로 보지 않고, 자식을 위해 희생해주는 위치에 서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이런 생각에서 시작 된 의문은 '모성애'와 '부성애'에서 멈춰섰다. 우리 사회는 부성애보다는 모성애를 더 강조하는 사회이다. 어떻게 보면 어머니의 사랑은 소중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등장하는 '모성애'의 모습은 항상 희생하는 모습으로 비추어지는데, 이것이 지속적으로 언론에 노출된다면 사람들의 사고는 자연스럽게 '모성애 = 희생'으로 보여질 수 있다. 또한 엄마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엄마'면서 왜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지 않아?"
  언론 매체에는그런 말이 있다고 한다.  소위 말하는 "그림이 되는 컷을 뽑기 위해서는 '아기, 소녀, 여성'을 선택하면 실패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그림이 되는 피사체를 선택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왜 사회는 여성을 시각적으로 대상화해서 바라보는 것일까.
 
  최근 등장한 음성인식 인공지능 서비스의 목소리는 '여성'의 목소리이다. 선택할 수 있는 기능이 있기는 하나, 기본적인 셋팅이 여성으로 되어있다. 여성의 목소리여야 더 안정감을 느끼고, 명령을 하기에 편하다는 이유라고 한다. 시각을 넘어서 청각까지. 여성은 타자화되어지고 대상화된다.
  이 사회는 언제쯤 여성을 여성 그 자체로 봐줄까.


순돌이와의 예정된 이별에 대해서는 늘 생각하면서, 정작 나이 든 엄마와의 이별에 대해서는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철없는 나는 엄마가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던 것 같다.

  예정된 이별이라는 말이 가슴 와 박힌다. 벌써 본가에서 지내지 않은지 6년째다. 방학 때 가끔 내려가 일주일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함께할 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의 새치는 염색약으로도 가려지지 않는다.
  어느 날은 엄마가 아빠의 새치를 염색해주고 있었다. 아빠는 원래 새치정도야 그냥 내버려두자는 생각을 하시던 분이었는데 말이다. 아빠도 이제는 염색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신다. 그만큼 아빠도 나이가 드셨다는 것이겠지. 나는 점점 자라나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엄마 아빠는 낙엽을 떨어뜨리고 계신다. 떨어지는 낙엽을 붙잡아 두고 싶다. 오늘은 오랜만에 아빠에게 전화를 해봐야겠다. 늘 통화 끝에는 "우리 큰딸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아빠의 목소리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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