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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ㅣ 박완서 아카이브 에디션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5월
평점 :
박완서님의 <나목>. 다섯아이를 키우고 나이 40세에 작가로 데뷔한 바로 그 소설이다. 글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고 읽는이의 기를 팍 꺾어버리는 책이기도 하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통해 그녀의 타고난 글재주를 경험했지만 이 소설은 정말 정신을 쏙 빼놓고 읽을 정도로 몰입감이 대단하다.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마지막 장을 넘길때까지 주인공의 마음이 되어 헤어나오지 못했다.
소설은 전쟁중 미군 PX의 초상화부에서 일하는 주인공 이경이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가족들 사이에서 겪는 마음상태에 대한 이야기이다. 특히 가족의 생계를 위해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린 박수근 화백의 등장이 무척이나 흥미롭다. <나목>에는 박수근 화백의 분신인 옥희도씨, 미8군에서 몸을 파는 다이아나, 동료 미숙, 잠깐 만난 미군 조, 훗날 남편이 된 태수 등 인간 군상들의 전쟁 속 삶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담고 있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평화를 바라고 있지만 그렇게는 안 될걸.
전쟁은 누구에게나 재난을 골고루 나누어주고야 끝나리라.
절대로 나만을, 혁이나 욱이 오빠만을 억울하게 하지는 않으리라.
거의 광적이고 앙칼진 이런 열망과 또 문득 덮쳐오는 전쟁에 대한 유별난 공포.
나는 늘 이런 모순에 자신을 찢기고 시달려, 균형을 잃고 피곤했다.
<나목> p049
전쟁은 모두의 삶을 뒤흔들었다. 주인공 이경은 전쟁 속에서 아빠를 잃었고, 두 오빠마저 잃었다. 그 충격에 엄마는 껍데기만 남아 텅 빈 삶을 선택했다. 이경은 '어쩌면 계집애만 남겨 놓으셨노'하며 세상과 자신을 원망하는 엄마가 애처로우면서도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계속 죽고 싶다, 살고 싶다를 되뇌었다. 전쟁이 나만이 아니라 모두를 쓸어갔음 싶었다. 그러다가도 전쟁이 또다시 덮칠까 너무나 무서웠다. 이경은 사는게 너무 괴로웠다. 전쟁의 상처와 외로움을 혼자서 감내해야만 했으니까. 이경은 자신처럼 벗어날 수 없는 현실때문에 괴로워하는 옥희도씨를 한눈에 알아봤다. 그들은 서로를 연민했고 위안받기를 원했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외로웠고 고통스러웠다.
미결인 상태, 그 몽롱하고 무책임한 상태가 주는 휴식이 지금의 나에게는 필요했다.
<나목>P367
이경은 전쟁의 혼돈 속에 혼자 버림받은 듯한 불안을 느꼈고, 누군가가 자신을 구원해 주길 바랐다. 그게 안된다면 무언가라도 저지르고 싶었다. 현실을 탈출하지 못하더라도 균열이라도 일으키고 싶었다. 하지만 남의 시선에서 초연할 수 없었고 현실도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도 옥희도씨도 나목같다고 죽은 나무같다고 괴로워했다.
나목. 잎이 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 하지만 나목은 죽은 나무가 아니다. 계절이 바뀌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잎이 나고 꽃이 핀다. 어떻게든 살아내기만 한다면. 소설임에도 박완서 작가와 박수근 화백의 삶이 녹아져 있어서 그런지 먹먹하고 애달프다. 자신의 생각과 목소리를 가감없이 드러낸 작가를 존경하고 나역시 주어진 삶을 그렇게 살아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