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베르 씨, 오늘은 뭘 쓰세요?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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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개미>가 선풍적인 인기를 모을 때 우리집 책장에도 당연한 듯 꼽혀 있었지만 나는 읽지 않았다. 십대였던 나에게 곤충이야기는 전혀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았고, 왠지 지루하고 어려울 것 같다는 프랑스 문학에 대한 편견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르베르의 인기는 나의 외면과는 상관없이 35년 남짓 지난 지금에도 여전하다. 이제는 안 읽고는 못 버틸 정도로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내가 읽은 몇 권의 소설들은 그가 왜 한국 독자들에게 오랜 기간 사랑받고 있는지, 대단한 팬층을 형성하고 있는지 충분한 이유를 말해주었다. 이토록 기발한 상상력과 이야기를 엮어내는 솜씨를 베르베르만큼 보여줄 작가는 없을 거라고 말이다.

베르베르의 에세이 역시 남다르다. <베르베르 씨, 오늘을 뭘 쓰세요?>에서 그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의 원천인 일상 속 이야기들과 지금까지 발표한 소설들의 숨겨진 비밀, 그리고 자신의 재능과 열정을 유쾌하면서도 흥미진진하게 특유의 글맛을 뽐내며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책은 타로의 스물두 개 카드에 자신의 인생 여정을 비유하며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유려하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그의 독특한 영감은 어디에서 나왔고, 어떻게 글을 쓰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지 궁금하다면 재미나게 읽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은 모두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베르베르 씨, 오늘은 뭘 쓰세요?>P069


자서전적 성격이 강한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의 남다름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는 현실을 일종의 영화처럼 대하는 습성이 있었다. 세상을 멀리서 바라보는 구경꾼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는 세상이 만들어내는 문제와 결과에 크게 관심이 없다. 그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자신이 누군지, 그리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바라본다. 그래서인지 그는 현실 속 인간관계에서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에 휩싸이지 않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사자, 나무 등과 같은 비인간의 관점에서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통상적 관점과는 전혀 다른 시각을 갖추고 있으니 그런 상상력 넘치는 소설이 나올 수 있는 거겠지. 게다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세상에 쉽게 휘둘리지 않으면서 편협하지 않게 볼 수 있는 힘을 갖게 해주니 베르베르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살고 싶다면 배워볼 만한 태도라고 생각된다.


소설가가 되는 비결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글을 쓰는 것이다.

<베르베르 씨, 오늘은 뭘 쓰세요?>P102


'내 사전에 포기란 없었다.' 베르베르는 집요하다. 그의 첫 작품<개미>는 전혀 다른 새로운 버전으로 20회 이상 다시 썼고, 장장 12년이 걸렸다. 이런 꾸준함과 더불어 그는 과감히 포기할 줄도 알았다. 오랜 시간을 바쳐 만들었어도 아무 말 없이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세상의 인연에 배우려고 했고, 너무도 다른 사고는 있는 그대로 이해하면서 가급적 판단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런 자세로 그는 멈출 줄 모르고 쉼 없이 돌아가는 운명의 수레바퀴를 버티고 받아들였다. 일이 잘 풀리다가 난처하게 꼬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상승기가 찾아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베르베르는 고통의 순간에서도 느긋해 보인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걸 비극으로 여길 필요는 없다고, 그저 배움의 자세로 영혼의 진화를 이루기 위해 지금의 삶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우리에게 말해준다. 결코 쉽지 않은 태도지만 결국 인생은 상승과 하강의 반복임을 알면 이 또한 지나갈 것이기에 꾸준하게, 포기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걸로 충분하다.

베르베르는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글 쓰는 당사자인 내가 느끼는 기쁨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지금 내가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지 혹시 내가 다른 것들에 마음을 쓰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게 한다. 나도 그처럼 조금 멀리서 나를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해 보인다.

꽤나 두껍지만 술술 읽히는, 글에 대한 흥미와 인생에 대한 지혜를 배우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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