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데이먼 갤것 지음, 이소영 옮김 / 문학사상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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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먼 갤것의 장편소설 <약속>은 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자, 백인우월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농장을 운영하는 백인 가족의 4번의 장례식과 30여년에 걸친 몰락의 과정을 통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극단적인 분리주의 역사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책은 정의와 현실, 죄의식과 친절함에 대하여 심각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옳은 윤리적 가치관이 무엇인지 사유해보게 하고, 상투적이지 않고 담담하게 작가가 바라는 이상적인 방향성을 보여준다.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 그리고 아버지의 약속이라는 그 문제가

아모르와 함께 전 세계를 따라다녔다.

그러면서 그 문제는 특정한 순간에는 마치 이방인처럼 그녀를 괴롭혔는데

거리에서 성가시게 졸라 대기도 하고 그녀의 소매를 잡아당기기도 하고

내 말을 잘 들어!하고 소리치기도 했다.

언젠가 대답해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다.

<약속> p190



암으로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엄마 레이철은 자신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흑인 가정부 살로메에게 현재 살고 있는 허름하고 낡은 집을 넘겨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아버지도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고, 막내딸 아모르는 이 모든 대화내용을 엿듣는다. 그러나 엄마의 죽음 이후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아모르는 아빠에게 살로메에게 집을 줘야 한다고, 엄마가 원하는대로 해줘야 한다고 주장해보지만 아빠는 그 약속을 무시해버린다. 시간이 흘러 아빠의 죽음 이후에도, 언니의 죽음 이후에도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살로메는 이런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없어 자기몫의 유산도 그대로 둔 채 농장을 떠나버린다. 어느 날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오빠의 자살소식을 듣고 지켜져야만 했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고향으로 향한다.



호의를 호의로 갚는 것, 바로 그게 인생이 돌아가는 방식이다.

<약속> p278



아모르의 가족은 사실 별다를 것이 전혀 없다. 그들은 그저 남아공의 평범한 백인 무리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흑인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신념 아래흑인들을 물리적으로 배척해야 자신들을 지킬 수 있고, 흑인들과 분리되어야만 자신들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이를 위해 흑인들에 대한 반인륜적인 차별을 정당화한다. 그러니 흑인 가정부에게 한 약속은 지킬 필요가 없고 지켜서도 안되는 것이다. 반면, 막내딸 아모르는 그들 사이에 숨어있는 죄의식과 친절함을 대변한다. 백인들의 당연한 듯 누리는 혜택이 사실은 탈취와 착취로 얻어진 것이기에 작가는 아모르의 말과 행동을 통해 정의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작지만 소중한 그 약속을 꼭 지켜야 한다고 그래야 남아공에도 희망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아직도 네가 모르고 있는 게 있는데, 네 것을 주는 게 아니야.

이 집은 이미 우리의 것이니까.

이 집뿐만 아니라 네가 사는 그 집도 그렇고,

그 집이 서 있는 땅도 그래. 우리 거야!

정리해서 호의로 나눠 줄 수 있는 네 소유물이 아니라고,

백인 아가씨, 네가 가진 모든 것은 이미 내 것이야. 내가 요청할 필요도 없이.

<약속> p475



책의 내용을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레 나를 둘러싼 현실들을 비춰보게 된다. 소설 속 배경과 비할 바는 못되지만 내가 사는 세상도 정의가 사라진 것 같을 때가 많다. 하지만 저자가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처럼 나 역시 그렇다. "사랑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오로지 친절만 남았지만 어쩌면 이것이 더 강할지도 모른다"는 책 속 구절처럼, 나와 다른 입장을 고집하는 이들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볼 수는 없어도, 경멸하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그리고 답답한 현실에 대하여 지금보다 조금은 친절해져야 한다. 결국 이념, 정치, 현실은 시간이 흐르면 과거가 된다. 침묵하고 외면하지 않으면 어쩌면 바라는 변화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찾아올 지도 모른다.

<약속>은 부커상 수상작이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해내는 책이다.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을 새롭게 하고 싶다면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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